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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잽잽 Apr 21. 2023

당신이 선 모습을 자세히 본 적 있나요

마흔 살의 복싱일기 -2

   나는 부끄럼이 많다. 왜인지는 모른다. 누구는 소심하다고 한다. 예전엔 A형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는 사실 B형이다. 요즘은 '너는 I야'라고 그냥 지정해준다. 그 무엇이 정답이든 내가 왜 부끄러움이 많은지는,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게 어디든 새로운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을 마주해야 하는 일, 게다가 숨을 수 없는 상황은 내게 꽤 스트레스다. 그러니 모두 헐벗고 헐떡헐떡 뛰다가 낯선 사람이 들어오면 대번 눈에 들어오는 복싱장 문을 여는 일은, 나에게 꽤 난이도가 높은 일이었다.


  그래서 일단 나를 칭찬하며 문을 열었다.

  씁씁 후후.



  직장 근처의 복싱장을 검색하다가 가까워서 그냥 골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관장님이 너무 무섭게 생겼다. 심기일전하고 들어온 초보에겐 좀 과분한 육체였다. 머리는 바짝 깎으시고 그렇게 동그래진 얼굴에는 매서운 눈매가 그려져있었다. 주먹에 많이 맞아서인지 많이 피하며 익힌 습관인지 턱과 입은 앙 다문채로 그다지 미동이 없는 편이었다. 동그란 얼굴만한 어깨를 양쪽에 달고 육중한 하체로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반...반갑지 않으신 건가


  마주앉았다. 친절? 글쎄 링 위에 서서 보여주는 모습에 비하면 이정도 친절은 감지덕지 하다고 해야할까. 아마존존조로로로존을 외치는 에버랜드 직원처럼 관장님은 조곤히 등록 절차를 소개해주었다. 묘한 추임새가 있었지만 그것도 그냥 나를 꼭 등록시키려는 의지라기보단 습관이었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거리다 1년치를 등록했다. 그래, 1년은 하겠지. 아니, 관장님이 1년은 해야된다고 했다.


  복싱장에 대해서는 루머가 많다. 몇 개월은 줄넘기만 시킨다는 소문이 대표적이다. 나는 그런 건 상관없었다. 다만 복싱장의 관장, 코치같은 분들은 뭔가 무서운 사람들일 것만 같았다. 특히 나는 어떤 남자들의 껄렁거림을 싫어하기도 하고 무서워하기도 하는데 그래서 PT같은 것도 이상하게 좀 꺼려지는 편이었다. 물론 나이스한 분들이 아주 많지만...겁쟁이 아니던가. 이 분들은 돈 받고 사람 때리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분들이니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그 사람들에게 돈을 내고 사람을 때리는 기술을 배우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정작 나도 돈을 내고 글러브를 끼러 가면서, 그런 이유로 돈을 내고 오는 사람들이라면 역시 어딘가 폭력적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카드 결제기가 삐비빅 돌아가는 잠시의 시간, 타 타 타 타 타 줄넘기 돌아가는 소리 쉭 쉭 쉭 쉭 쉐도우하는 소리 팡 팡 팡 팡 샌드백 후려치는 소리들이 체육관 여기저기에 퍼졌다. 거울 앞 혹은 허공 혹은 거대한 쌀자루같은 물체 앞에서 땀을 흠뻑 흘리는 사람들. 


  역시 어딘가 무서워보이는데...


  타 타 타 타 타

  쉭 쉭 쉭 쉭 쉭

  팡 팡 팡 팡 팡


  다만 인간의 목소리가 섞이지 않은, 던지는 자와 부딪치는 물체 사이의 마찰음들은 가만히 듣고 있기 좋았다. 등록을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관장님이 말했다. 


"오늘부터 운동 하고 가실거죠?"


  여전히 영혼은 실려있지 않았으나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물론 나는 그럴 예정이 없었다. 오늘의 미션은 문을 열고 등록하는 것까지였다. 하지만 이미 나의 양 손은 관장님의 두꺼비같은 손 위에 살포시 포개져 스트랩에 칭칭 감기고 있었다.


"줄넘기 3라운드 하고 보실게요~"


  쿨하게 사라진 관장님을 뒤로하고 줄넘기를 마쳤다. 몸무게가 나가는 편은 아니라 많이 힘들진 않았지만 둔탁하게 뛰고나니 하체가 욱씬거렸다.


  관장님이 다시 다가왔다. 성큼성큼.  나를 전신 거울 앞으로 바짝 당겼다. 속절없이 당겨진다. 시키는대로 해본다. 몸을 옆으로 선다. 어깨너비만큼 다리를 벌린다. 오른발을 편안하게 뺀다. 그리고 시선은 정면을 응시한다. 양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며 몸의 무게를 느낀다. 턱을 당긴다. 왼쪽 주먹은...


 이상하다. 아주 단순한 동작들인데 너무나 어색했다. 그냥 서서 팔을 드는 일일 뿐인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엉거주춤하기 짝이 없었다. 분명히 무릎도 살짝 굽혔는데 몸이 부웅 떠있는 느낌이었다. 관장님은 앞 뒤로 살짝씩 움직이며 스탭을 알려주었다. 몸이 붕붕 날아다녔다. 경박하기 그지없는 3분 3라운드. 그렇게 딱 9분 그냥 서서 앞 뒤로 왔다갔다 했을 뿐인데 등 뒤로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알리가 말한대로 나비처럼 그렇게 풀럭거린 것 같은데...


  


  라운드 종이 울리고 거울 앞에 서서 자세를 고쳐잡아보았다. 내 몸을 고스란히 마주했다. 내 얼굴이 보였다. 가녀린 두 다리를 딛고 서 있는 서른 아홉의 내가, 거울 안에 있었다.


 나는 인생에서 두 번의 여드름 폭격을 맞은 적이 있다. 한 번은 고3 그리고 또 한 번은 군대. 내 몸은 어찌나 그리 솔직한지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 썩어문드러진 마음이 얼굴로 올라왔다. 그래서 고3때 한 번 군대에서 한 번, 나는 내 얼굴을 싫어해야 했다. 쳐다볼 수도 없었다. 


  참 오랜만에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몸의 부위가 따로따로 노는 듯한 우스꽝스러움. 발가락은 발가락만 자기들끼리 지탱하고 무릎은 무릎만 지탱하고 허리는 혼자서 놀고 그래서 좁은 어깨엔 힘이 바짝 들어간 채로 대롱대롱 달린 팔과 얼굴을 감당하는 상태.


  뭘까 이건?


  그 커다란 거울에서 나는 마흔을 앞둔 내 모습을 비로소 제대로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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