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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잽잽 May 08. 2023

첫 스파링, 나는 여기에 있다

마흔 살의 복싱일기 -4

  복싱장에 꾸준히 출근한 지 조금 됐을 무렵, 줄넘기 3라운드를 해도 세상이 빙빙돌지 않고 기본자세를 잡아도 중심이 서있다고 (스스로) 믿었던 무렵부터 나는 감히 '대회'를 꿈꿨다. 그땐 운동에 목표가 있으면 더 열심히 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하고도 무모한 마음일 뿐이었다. 복싱이라면 역시, 동양챔피온이지! 귀엽게도 말이다.



  코치님! 저는 동양챔피온이 되고싶습니다!


  그래서 괜히 쉬는 시간마다 코치님에게 생활체육대회는 어떤지, 나같은 놈도 나갈 수 있는지, 언제 열리는지 따위를 물어보곤 했다. 그런 내가 웃겼을까 아니면 본때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셨을까. 어느 날 코치님이 나에게 물었다.


  "저랑 스파링 한번 해보실래요?"



  여기서 잠깐. 우리 오전 시간 코치님은 나보다 나이도 한참 아래거니와 새하얀 얼굴에 하회탈 상으로 그 어디에도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스타일의 남자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참 보기드문 청년이다. 온몸에 군살이라곤 없고 다소 야위어보일 정도의 몸에 헤벌쭉 웃으며 가르쳐주시니 처음엔 그저 사람 좋은 친구구나...했다. 그러니까 스파링을 해보기 딱 직전까지 말이다.


  최근에 샤워실에서 우연히 코치님을 만났는데, 이미 스파링 뒤로 겸손해졌지만... 온몸에 찢어진 근육을 보고는 감탄 아니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코치님은 이제 막 MMA(종합격투기)를 3년째 배우고 있다고 하셨는데 뭐랄까, 요즘처럼 온갖 매체에서 남자의 벗은 몸을 쉽게 볼 수 있는 시대에 범접하기 힘든- 소위 실전 근육의 소유자였다. 몸을 바꿀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그런 코치님의 친절한 안내 아래 마우스 피스를 맞추고 처음 끼워보았다. 헤드기어까지 차고나니 벌써 어디선가 함성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가슴이 웅장해졌다. 코치님이 누누히, 맞아도 아프지 않을테니 겁먹지 말고 들어오라고 하셨다. 그래 헤드기어도 했고 글러브도 꼈고 거기다가 코치님이 날 때려봐야 뭐 얼마나 세게 때리시겠어, 부딪쳐보자!


  땡.


  링 아래 넓은 체육관에서 스파링을 시작했다. 시작부터 이상했다. 서로 조이스틱 버전이 다른 게임 플레이어처럼 코치님은 부드럽게 여기저기를 움직이는데 나는 삐걱삐걱 시작부터 갈길을 잃었다. 조금 다가갔다 싶으면 어느새 사이드에 있었고 멀어졌다 싶으면 내 옆구리까지 코치님의 숙인 몸이 들어와있었다. 때리려면 상대가 어디있는지 감이 잡혀야 하는데 도무지 위치와 거리감이 잡히질 않았다.


  심기일전해 잽을 몇 번 던져보고 라이트를 날렸지만, 무게가 무너졌다. 더블잽을 해도 상대는 멀어지기만 할 뿐 도무지 내 사정거리엔 들어오지 않았다. 슬슬 조바심이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던 찰나 급하게 잽을 던졌다. 그때,,,,그래,,,급하면 안되는데,,,, 


  터---억


  턱에 코치님의 카운터가 그대로 꽂혔다. 분명히 안 아팠다. 그러니까 코치님이 말한대로 그런 종류의 '아픔'은 아니었다. 뭐랄까 시멘트 벽에 머리를 부딪혔을 때의 '딩----'한 울림처럼 '아픔'이라고 말하기엔 조금 다른 종류의....좀 더 근본적인 두려움을 야기하는 그런 감각이었다. 순식간에 몸이 쫄았다. 말려들어간 안에서 눈은 쉽게 앞을 쳐다보지 못했다. 서서도 보이지 않던 상대였으니 콩벌레가 된 내게 코치님이 보일 리 만무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먹이 날아왔다. 그런 주먹에는 살살 맞아도 데미지가 쌓였다. 공포감도 커졌다. 반발심에 내민 주먹은 그저 허공에서 춤추는 초등학생의 그것이었다. 


  땡. 

  아인슈타인은 천재다. 시간은 정말 다르게 흐른다. 이건 같은 3분이 아니다.

  1라운드가 끝났고 날 노려보던 코치님은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걱정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괜찮았다. 숨이 너무 가쁘고 머리는 딩했다. 약속된 스파링을 한 것임에도 길가에서 습격을 당한 사람처럼 당황해 있었지만 뭐랄까- '기분'이 괜찮았다. 또 맞을까봐 무섭기도 했지만, 또 맞아보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한 라운드를 더 두들겨 맞고, 코치님께서 말했다.


  "내일은 나오지 말고 쉬세요."


  관원을 이렇게 내쫓는 것일까. 내일도 나오고 말테야...라고 생각했지만 자고 일어나니 40년 인생 처음 맞아본 턱 주변이 무겁게 느껴졌다. 사무실에 앉아 턱을 만지며 이 생소한 느낌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 나에게 정확하게 꽂힌 주먹을 떠올렸다. 



  투명하게 돌아다니던 몬스터가 타격에 정확히 맞으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게임에서처럼, 어딘가 발각된 기분이었다. 온갖 거짓과 가식과 허위와 질투와 혐오가 가득한 세상에서 나는 어디를 떠돌아다니고 있을까 고민하던 마흔 살에게 


  네가 있는 곳은 바로 여기야!!! 


  라고 주먹이 소리치며 다가온 느낌이었다. 상대를 맞추려고 찾아다녔지만 결국 그 끝에 찾은 건 내 위치였다.  말로, 생각으로 사람들을 공격하고 또 그들로부터 나를 방어하던 10여 년의 직상생활이, 혹은 중학교 교정에서부터 지금까지의 20여 년이, 이제사 피할 수 없는 링의 끄트머리에 툭 하고 부딪힌 것 같았다.


  그렇구나, 나는 비록 이렇게 약하고 또 늙어가고 있지만 ---

  '여기에 있구나'- 라는 안도감. 그것만으로도 괜찮아지는 마음이 꽤 많았다.

  숨가쁘지만, 30초 뒤에 또 올라갈 수 있다는 건 기대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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