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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잽잽 May 15. 2023

맞을 땐 당당하게 맞아라

마흔 살의 복싱일기 -5

  스파링을 처음 하면 당연히 맞는다. 처음부터 맞는 게 크게 두렵지는 않았지만 그건 그냥 아픈 건 나름 잘 참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스파링을 하다 몇 대 맞다보면 통증때문에 불편한 경우는 잘 없었다. 기본적으로 일반인들이 하는 스파링이고, 헤드기어와 글러블를 끼고 하면 간혹 리버샷에 숨이 안쉬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너무 아파!!! 눈물이 나는 일은 잘 없다.


동물과 동물의 싸움에선 기세가 전부다


  다만 실제로 한 대 두 대 맞기 시작하면서 생기는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마치 초식동물이 육식동물과 대치하다가 결국 '먹이'가 될 때의 과정과 비슷하다. 포효하는 소리에 이미 질리거나 한두합 힘을 겨루다 밀리면, 초식동물은 맞서 싸울 의욕을 잃고 깨갱 소리를 낸다. 사람도 복싱하면서는 마찬가지다. 부딪치면 순식간에 다리가 얼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특히 초창기엔 무게중심이 점점 뒤로 넘어가며 턱이 들리고 그러다보면 정타를 연달아 맞게 된다. 그런 과정은 사실 아파서 일어난다기보단, '기세에 밀려서' 그렇다. 한 번 밀린 기세를 되찾는 건 아주 어렵다.


  매주 같은 시간에 스파링을 하다보면 늘 비슷한 회원님들을 만나게 된다. 나는 여의도의 복싱장에 다니는데, 여의도 바닥에 그렇게 주먹이 센 사람이 많은줄 미처 몰랐다. 더욱이 대부분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분들이다. 그중에 한 분은 아마 쉰은 족히 넘어 보이시는데 사실 처음 스파링 상대로 정해졌을 때 속으로 내심 해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가 일단 내가 어리고, 키도 내가 더 크며, 몸을 봐도 대단히 힘이 세거나 순발력이 좋을 것 같다고 느껴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요리조리 열심히 뛰다보면 그래도 붙어볼 만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시절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지금은 거의 매주 금요일마다 그분께 얻어맞는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같은 남자에게 얻어맞는 기분을 아는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돈을 내는...이상한 매커니즘이 복싱장엔 있다. 3주 연속으로 스파링 2라운드를 그분과 뛰고 나 헥헥대고 앉아있을 때, 내 곁에 와 털썩 앉아주었다. 그러고는 한 마디 해주셨다.


  맞을 때는 당당하게 맞아야돼


  당당하게 맞는 게 뭐죠?


  그냥 두 다리 딱 박고 가드 올리고 때려봐라 하는 게 낫다 이말이야. 

  그리고 계속 쳐다봐야 돼 상대방을


  사실 맞기 시작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두 다리를 땅에 박는 것고 앞을 보는 것이다. 그게 가장 쉬울 것 같은데 잘 안된다. 영상에서 보면 더킹이나 위빙이나 멋지게 피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건 사실 맞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코치님은 늘 복싱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붙기 전까진 스포츠지만 붙으면 싸움이죠 그냥


  일단 두 육체가, 누군가의 주먹이 누군가의 얼굴 등에 강타하는 순간 그 순간에도 차분하게 상대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맞고 난 다음을 예비할 수 있다. 가드를 제대로 올리지 않으면 턱이 들려 카운터를 세게 맞는다. 혹은 가드 안으로 얼굴을 박고 허리를 숙이면 상대가 아예 보이지 않아 공포심이 증폭된다. 그리고 다리가 박혀있지 않으면 주먹을 낼 수 없다. 설사 보이지 않더라도, 내가 그냥 '먹이'가 될 생각이 없음을 보여줘야 한다. 한 번 들어왔다가 그렇게 휘두른 주먹에 맞고 나면 상대방도 그 다음부턴 쉽게 들어오지 못한다. 앞서 말했던 육식동물들도 먹잇감이 격렬하게 저항하면 오히려 꽁무니를 내빼기도 하지 않던가.

언젠가 이런 날이 오겠지...

  


  나는 그날 그 회원님의 말을 하루종일 되새겼다. 너무 멋지지 않은가. 맞을 때 당당하게 맞을 수 있다면, 살아가는 데 무서울 게 무엇일까. 내 자리에 버티고 서서 가장 중요한 것들만 지키고 대신 앞은 똑바로 쳐다보는 일이 가능하다면, 삶의 어떤 공격이 나를 때려눕힐 수 있겠는가. 그뒤로 나는 복싱장에 갈 때마다 세상의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한 초식동물의 셀프트레이닝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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