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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잽잽 May 17. 2023

직장인의 핵펀치

마흔 살의 복싱일기 -6

  복싱장에 좀 다니다보면 인사를 하진 못했더라도 서로 대충 얼굴은 트고 다니는 사람들이 생긴다. 특히 나는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자주 가는데 나와 같은 사정의 여의도 직장인들과 땀을 흘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처음 복싱을 배우겠다고 생각했을 땐, 아무래도 이 운동이 굉장히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게 아니다보니 사람없이 휑할 거라고 생각했다. 요즘 대세인 골프나 테니스에 비하면, 사실 마이너하고 누군가에게는 조금 꺼려지는 운동일 수 있으니 말이다.


직장인에게 점심을 먹지 않는다는 것


  물론 바글바글한 체육관을 경험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점심시간에 밥을 마다하고 복싱 글러브를 끼는 직장인들은 적지 않다. 내가 대충 연령의 기준점이 되는 것 같고 30대 후반에서 40대 후반까지,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몸매의 사람들이 쉭쉭 잽을 날린다. 직장인에게 점심시간이란 무엇인가? 오전 업무를 마치고 합법적으로 노닐 수 있는 황금같은 시간, 맛있는 점심을 먹거나 가성비 있는 메뉴를 고르면서 오늘 하루의 자존감을 충전하는 시간?


  누군가에게는 그럴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쉬고싶은 순간마저 누군가와 함께 해야하는' 아주 귀찮은 시간이다. 내가 점심시간에 훌쩍 일어나 운동을 하러 갈 수 있는 이유도 애초에 점심 약속 잡는 걸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이다.(물론 저녁 약속 잡는 건 더 싫어한다.) 업무와도 직장 동료와도 연결되지 않은 나만의 시간, 그런 점심시간을 간절히 원했기에 운동을 다니기 전에도 대부분 한적한 시간에 혼자서 밥을 먹곤 했다.



 직장인의 핵펀치


  그런 사회부적응자들이 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실 내가 복싱하는 모습을 내가 제대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잘 모르겠지만, 동병상련의 직장인들이 여기저기서 각자의 실력대로 주먹을 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리만치 절박하다. 저들이 프로복서가 되거나 MMA 선수가 되기로 결심한 것도 아닐테고 이게 무슨 골프나 헬스처럼 정량화된 실력의 상승을 시험하는 운동도 아닌데, 모두가 이 우스운 운동에 굉장히 처절한 표정이다. 손을 내밀고 다시 넣는 단순하고도 짧은 동작 사이에 자신의 무언갈 실어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아 네 팀장님

  어 김대리 그 건은 말이야

  저번엔 우리가 어떻게 처리했지? 레퍼런스 좀 줘봐


  나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다. 점심시간에 날 찾는 전화는 웬만해선 오지 않는다. 에어팟의 부작용은 복싱장에서 확실히 검증된다. 운동을 하는 와중에도 귀에 꽂은 하얀 물체로 회사의 전화가 울려대는 모양이다. 쉭쉭 잽을 날리다가도 멈춰 업무하는 그들의 눈은 늘 허공을 보고있다. 내 눈앞에 죽여버릴 원수가 있는 것처럼 노려보던 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다리를 움직이던 이들이 멍하니 서서 오직 뇌와 입만 살아있는 사람처럼 통화한다.


  그들이 무엇을 향해 그렇게 절박하게 주먹을 내질렀는지, 그 모습을 보다보면 느낄 수 있다.



체육복보다 무거운 전투복의 하루


  체육복을 입은 직장인들의 모습은 그래도 어딘가 앳되다. 대학 때, 혹은 어렸을 때 어떤 모습이었을지 조금 짐작이 간다. 그들이 우르르 몰려가 샤워를 마치고 양복따위의 전투복으로 다시 갈아입고 나오면 몇몇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다른 모습이다. 오늘도 여의도의 수많은 직장인들은 뇌와 입을 출근시키고 하루종일 버텨내겠지. 그렇게 앉아있는 하루가, 복싱장에서 1시간 운동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뇌와 입은 놔두고 나머지 온 몸으로 움직이는 하루 1시간이, 그래서 내겐 천금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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