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잽잽 Apr 25. 2023

잽 - 방어가 최선의 공격이다

마흔 살의 복싱일기 - 3

  스탭의 맛을 봤다면 엉거주춤하더라도 다음 진도가 이어진다. 복싱의 가장 기본 공격은 당연히 앞손, 즉 '잽'이다. 오른손잡이인 내게 왼손을 주도적으로 활용한다는 건 영 어색한 일이다. 게다가 내 왼손은 꽤 하자가 많다. 초등학교 때 탈골 한 번, 중학교 때 골절 두 번, 군대에서도 골절 한 번 그렇게 총 네 번의 장기요양 거쳤다.


  초등학교 땐 해동검도 도장에서 점프하며 검을 휘두르는 동작이 있었는데 착지를 하다 그만 왼손부터 떨어졌다. 태어나 처음으로 팔이 접히지 않는 묘한 긴장을 느꼈는데, 통증이 극심했다기보단 공포가 엄청났다. SF영화 속 괴물처럼 왼팔이 덜렁덜렁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관장님은 도인같은 분이었는데 아무렇지 않은 듯 나를 사무실로 데려가시더니 보인이 직접 뼈를 맞춰주었다. 그때서야 알았다. 아프구나!


  중학교 때 두 번의 골절 중 한 번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기가막힌 노릇이었다. 학원에 가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차도 갓길을 달리고 있었는데 맞은편에서 갑자기 차가 내쪽으로 달려왔다. 한산한 바닷가 도로였고 굳이 이쪽으로 오지 않아도 됐었는데 질겁한 나는 핸들을 돌렸고 그대로 인도에 내동댕이쳐졌다. 왼팔을 딛고 떨어졌는데 이번엔 통증이 꽤 심했다. 운전자가 내려 괜찮냐고 물었는데,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세상 시크한 대답으로 짜증을 조금 내고는 자전거에 다시 타려했는데 웬걸- 핸들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상했다. 분명 그냥 인대가 좀 놀랐구나 싶었고 그래도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쿨한 척 답답한 마음에 오른팔로 왼팔 마디를 내려쳤다. 


  뽀각.


  분명히 그 소리를 들어놓고도 나는 학원으로 향했다. 자전거를 질질 끌고 학원에 도착해 수업을 듣는데 팔이 점점 더 아파왔다. 학원 선생님이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직행했고 X-ray에 선명히 보이는 부서진 내 팔을 보고서야 눈물이 질질 터졌다. 중2병은 팔도 부순다.


  그때 팔이 잘못 붙은 것인지 지금도 왼팔은 안으로 완전히 돌릴 수가 없다. 오른 손바닥은 하늘을 향하게 돌릴 수 있는데 왼손바닥은 45도 기우는 게 전부다. 팔굽혀펴기를 해도 내려갈 때면 왼손 엄지쪽이 말려 올라온다. 

 

  .

  

  코치님을 따라 왼팔을 앞으로 툭 내밀었다. 역시나 어색한 통증이 느껴졌다. 야구공을 던지듯 몸의 회전을 살려 가볍게 툭 던지라고 했다. 손에 공이 없는데 어떻게 공을 던지란 말인지 엉거주춤한 스탭 위로 헛둘헛둘 잽을 날려보지만 어색했다. 보다못한 코치님이 내게 바짝 붙어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오른쪽 옆구리를 찍어누르면서 몸의 반동을 왼쪽 어깨에 싣는다. 트위치, 그러니까 꼭 경련이나 발작처럼 순간적으로 몸을 조인다. 왼쪽 어깨는 턱에 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돌려주면서 자연스럽게 팔을 뻗는다.


  잽. 그것이 잽이었다.


  나중에 스파링을 하면서 알게된 거지만 기초가 훈련돼있지 않으면 잽에 가장 많이 얻어맞는다. 상대방의 잽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잽을 내미는 타이밍에 라이트 스트레이트나 훅이 파고든다. 턱을 닫고 왼손을 밀지 않으면 잽은 그저 내 턱을 열어젖히고 때려달라고 부탁하는 구애의 동작일 뿐인 셈이다. 잽은 공격을 위한 것이지만, 그것이 오직 방어로도 기능할 때 안전한 공격 기술이 된다.


  성인이 되면 팔이 부러질 일이 없을 만도 한데 마지막에 부러진 건 스물 셋의 여름, 군대 휴게실에서였다. 나름 상병 말호봉으로 고참 대열에 접어들었는데 아직도 제대를 하지 않은 꼬장 고참이 하나 있었다. 다혈질에 전라도 조폭처럼 행동하는 걸 좋아하는 동생이었는데 그날도 뭣때문인지 본인 근무장 후임과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 후임은 나랑 두 달 차이 군번이었는데 이젠 서로 짬도 차고 내가 한참 형 뻘이라 수능 시험 공부를 도와주는 그냥 동네 동생같은 사이였다. 다만 그녀석도 지나치게 다혈질인 성격이라-그러고보면 군대에 가면 다혈질이 되는 걸까?- 말년 병장의 헛소리를 그냥 넘어가주질 않고 맞받아 싸웠다. 덩치도 병장보다는 훨씬 컸다. 냉동음식이 전자레인지에서 잔뜩 돌아가던 주말 휴게실에 불필요한 긴장감이 고조됐다.


  이대론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병장은 뭔가 보여주기로 맘먹었다. 근무장에 가서 쇠파이프를 들고 오라고 막내에게 시켰다. 나름 생활관 실세인 내가 말로 몇 번 제지했지만 전혀 먹히질 않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군대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 뭐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그래도 별일이 있으면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는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쇠파이프가 도착했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른 타이밍에 말년 병장은 후임을 위협했다. 깡그랑 소리에 후임도 주먹을 내던지려는 기세로 맞붙었다. 나는 말없이 그 둘 사이에 섰다. 아 x뱀(병장의 준말) 그만 하지 말입니다. 하지만 x뱀은 그만하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에 든 쇠파이프가 내 어깨 옆을 지나 후임의 머리로 향하던 찰나 나도 모르게 왼팔로 그 쇳덩어리를 막았다.


  뽀각.


  작은 소리와 함께 상황은 종료됐다. 10년 전 부러졌던 곳과 거의 같은 곳이 또 부러졌다. 그날이 내가 군대에서 마지막으로 맞은 날이었다.



  잽.잽.잽.잽.잽.잽.잽.잽.


  혹시 내가 그때 잽을 알았더라면, 그냥 맞기만 하는 게 아니라 뭐라도 내질러볼 수 있었을까. 뭐라도 내지르면서 동시에 안 맞을 수도 있었을까. 군대 보일러실에서 독서실에서 옥상에서 휴게실에서 부지런히 얼차려하며 가슴팍과 정강이를 걷어차이던 그날들이 혹시 조금은 달라졌을까.


  잽 하나를 배우고 별 생각을 다 했다.

작가의 이전글 아들은 왜 넘어져야 하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