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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잽잽 May 22. 2023

쉐도우가 가르쳐준 나와의 싸움 비법

마흔 살의 복싱일기 -9

쉐도우는 도대체 뭐하는 일인가요 


  복싱을 처음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보고 싶은 게 있다. 영화에서도 많이 나오는 바로 그 장면, 슉슉 혼자서 쉐도우를 멋지게 하는 모습이다. 사실 그 모습은 미디어에서 희화화도 많이 되고(가령, 이거슨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야~라든가,,, 양쪽 코를 엄지로 슥슥 긁는 모습처럼,,,) 보기에 대단히 어려워보이진 않아서 복싱을 배우기 전의 나에게도 선망의 대상이 되진 않았다. 


  예를 들면 농구 선수들이 크로스오버하는 모습을 보거나 축구 선수들이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리프팅 해내는 걸 보면 어떤 종류의 존경심 같은 게 들지 않는가. 하지만 복싱 선수가 쉐도우하는 모습은 뭐랄까, 존경심보다는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에 가까운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복싱하는 사람들은 다 어딘가 마음에 문제가 있나...뭐 솔직히 그런 느낌이었다.



누...누구를 위하여 주먹을 휘두르나


  하지만 복싱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은, 그 자세와 그 리듬을 만들어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안다. 쉐도우에서 가장 중요한(혹은 어려운) 것은 3분 라운드 내내 내 앞의 한 대상을 실제로 그려내는 것이다. 구체적인 얼굴을 그리는 경지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어떤 투명인간을 정해놓고 3분을 뛰어다닌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니, 우스워지기 아주 쉬운 일이다.


  하다못해 3분동안 움직이지 않고 앉아 명상을 하라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3분 동안 허공에다가 어떤 대상을 놓고 그 대상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심지어는 계속 움직인다고, 거기다 이따금 나를 향해 공격할 거라고 상상해서 거기에 맞춰 내 발을 움직이는 게 쉐도우의 기본이다. 헛깨비가 보이는 사람이라면 모를까...처음 배우는 입장에선 스파링을 여러번 하거나 시합을 나가면서 여러 이미지-경험이 쌓이지 않는 한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쉐도우의 쉐도우가...내 그림자였다니..


  솔직히 나도 거의 30초 정도에 한 번씩 쉐도우 중에 타겟이 사라진다.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 머쓱하니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자세 연습하는 척을 한다. 그러다가 이러면 안되지, 부모의 원수!!!! 라는 마음으로 다시 누군가를 그려본다. 어른거리는 그를 향해 슉슉 주먹을 뻗어보지만 그는 비웃듯 금세 사라진다. 그럼 다시 거울 속의 나, 초보자의 쉐도우는 이런 일의 반복이다. 초보자의 쉐도우, 그림자는 계속 자기 자신이다.


  아마 3분 동안 춤을 춰보라고 해도 비슷할 것이다. 춤의 여러 매커니즘이나 기본 루틴을 충분히 익힌 사람이라면 어떤 음악이 나와도 비트에 맞춰 3분동안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게 없다면, 막춤을 3분동안 집중해서 춰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그런 재능이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3분은 아주 아주 긴 시간이다. 내가 춤을 춰야하는데, 춤이 나를 추게 되는...그런 초보자의 시간이 있다.


  허상에의 집중이 어려운 건 그렇다 치더라도, 실제로 어딘가를 맞추거나 때릴 일이 없는 쉐도우에서 주먹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도대체 뭘 연습해야 할지는 또 다른 문제다. 여기서 바로 '짧게 치는 일'의 어려움이 드러난다. 스파링을 하거나 심지어는 전문 복서들이 경기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두 사람이 거리를 잡다 맞붙었을 때, 소위 교과서에 나오는 자세 그대로 원투쓱박 원투레프트훅을 날리는 사람은 없다. 일단 불가능하다. 그런 완벽한 자세를 유지하며 격투의 순간을 맞이할 수도 없거니와 실전에서는 보이는 시야, 호흡, 긴장도 모든 게 다르다. 


짧은 주먹으로 리스크 컨트롤


  여기서 승부를 가르는 멘탈이 냉정함이라면

  승부를 가르는 주먹은 바로 욕심없이 짧게 내는 주먹이다.


  신체 접촉이 어느 정도 금지돼이었는 농구나 축구 같은 구기종목에서, 부딪치는 순간 무게중심이 무너지거나 임기응변으로 헤쳐나가는 모습들(예를들면 메시)은 종종 발견될 수 있겠지만 복싱과 같은 격투에서는 그게 그냥 그 스포츠의 본질이다. 서로 때려서 무게중심을 잃어버리게 하고(심지어 못 일어나게 하면 KO라고 박수치고 환호하는 게 이 스포츠 아니던가!) 그래서 그의 주먹은 허공에 날아다니는 기러기의 날개짓처럼 펄럭거리게 만드는 일이 곧 복싱이다. 


  실제 링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그렇기 때문에 쉐도우에서는 아주 짧은 주먹을 연습해야만 한다. 마치 주먹이 내 겨드랑이에서 피어난 기생수의 무엇인 것처럼, 그렇게 소중하게 가지고 있다가 소중하게 내민다. 혼자서 나갈 순 없고 발과 허리와 어깨의 허락이 떨어졌을 때만, '보리쌀'하는 아이처럼 쇽 내밀었다가 쑥 하고 회수한다.


  물론 주먹의 길이를 짧게 내는 게 좋다는 뜻이 아니다. 길이의 문제라기보단 욕심의 문제다. 내 양 어깨 사이, 조금 더 좁게 보면 내 얼굴의 양 끝 사이에서 내 주먹이 직선으로 빠르게 나갔다고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내 얼굴과 내 상체를 보호하면서 공격을 해나갈 수 있다. 무언갈 꼭 때려부술 것처럼 힘을 실어 휘두르는 주먹은 어차피 실전에서 튀어나오게 되어있다. 실수를 일부러 연습할 이유는 없다. 

쉐도우...이미지를 찾아보려 했는데...이것이 바로 쉐도우다!

나와 싸우는 방법을 아시나요? 


 "모든 것은 나와의 싸움 " 같은 진부한 말에서, 나는 가끔 큰 깨달음을 얻는다. 어떤 말이 진부하다는 건 그만큼 오래됐다는 거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해왔다는 뜻이된다. 결국 그 안엔 무언가가 있긴 있다. 다만 그것을 상큼하게 느낄 만한 현실의 계기 같은 게 잘 없을 뿐. 내 그림자와 허둥지둥 어설픈 댄스를 추는 쉐도우 복싱을 하다보면, 나와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걸 알게 된다. 모든 것은 나와의 싸움이라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나와의 싸움을 하는 방법을 알라-가 내가 깨달은 저 진부한 말의 핵심이다.


  하나는 집중이다. 비록 허상일지라도, 내 앞에 있는 문제의 본질을 계속해 노려보고 예측하고 대응한다. 잠시도 쉬어선 안 된다.

  두 번째는 바로 '나를 보호하는 '것이다. 크고 멋진 주먹으로 때려부수는 것도 가능하면 좋겠지만, 복싱에서 그렇듯 삶에서 내게 다가온 대부분의 문제들은 내가 아무리 힘줘 부순다고 대도 파괴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내가 얻어맞아 산산조각날 가능성만 높아질 뿐이다. 내 얼굴 앞, 내 어깨 사이, 바짝 올린 가드 안에서 가볍게 가볍게 주먹을 내야 나를 보호할 수 있고 동시에 상대의 공세를 지연시키거나 운좋다면 반격할 수 있다.



  오늘도 큰 주먹 내지를 생각따윈 고이 접어두고, 내 몸 하나-내 가족의 행복 하나 건사하기로 한다. 그것을 위해 더욱더 내 앞의 생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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