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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잽잽 May 19. 2023

아프니까... 힘을 뺄 수 있다

마흔 살의 복싱일기 -8

  복싱 스파링은 당연히 혼자 하는 쉐도우복싱보다 힘들다. 라운드 종이 울리고 나면 가쁜 숨을 내쉬느라 30초가 세상 짧게 느껴진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조금 이상하다. 쉐도우 할 때보다 훨씬 덜 이동한 것 같은데도 호흡이 가쁘다. 스파링 내내 온 몸의 근육에 힘을 너무 줬기 때문이다. 긴장한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공격과 수비 모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는데 초보자는 여기에 자기 리듬과 호흡을 넣기가 어렵다. 줬다 뺐다 자기 리듬으로 스파링을 해야하지만 수비할 땐 안 맞으려고 안간힘이고 공격할 땐 어떻게든 보내버리겠다느 마음으로 막 휘두른다. 숨은 안 쉬게 되고 근육은 경직된다. 피로가 배가 된다.


힘빼고 어떻게 때리라는 건지...


  복싱은 기본적으로 인터벌 운동이다. 온몸의 근육과 심폐기능을 힘껏 쏟았다가 다시 뺐다가를 반복한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칼로리 소모가 많고 땀도 많이 나 다이어트 운동으로 인기가 많다. 그런데 스파링만 하면 어느덧 무산소 운동에 가까운 일이 된다. 끝나고 나면 꼭 고수 회원님들이 힘을 좀 빼라고 이야기해주는데 그걸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힘을 뺄 만하면 치고 들어오더만 뭘 어쩌라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한참을 맞은 스파링 날이었는데 끝나고 나니 오른손 손목이 쑤셨다. 정확히는 오른손 새끼손가락 주변의 손등부터 손목까지 굉장히 낯선 통증이 느껴졌다. 하루 자고 나면 낫겠지 싶었지만 다음날은 땅을 짚고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아팠다. 분명히 누군가를 제대로 때린 적도 없는 것 같은데, 뭔가에 잘못 부딪친 오른손은 억울하게 아프기만 했다. 대학 시절 혜화동을 걷다가 생전 처음으로 기왓장 격파같은 걸 해봤다가 한동안 손을 쓸 수 없게 됐던 그때가 아련히 떠올랐다...


손목 부상을 예방하려면 스트랩도 필수지만...타격 부위를 끊임없이 익혀나가야 한다

  하지만 다음 날도 복싱장에 나갔다. 물론 샌드백이나 스파링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스트랩만 차고 쉐도우를 그 라운드만큼 더 했다. 쉐도우하며 주먹을 내질러도 조금만 힘이 실리면 손목이 아렸다. 그래서 살살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발가락과 무릎, 허리와 어깨까지 스탭에 실린 내 몸이 상당히 경쾌하게 느껴졌다. 콤비네이션도 몇 번 연습하고 나면 근육이 못 버텨 지속하기가 어려웠는데 원투훅투 원투슥박 원투 백스텝 쭉쭉 이어졌다. 쉐도우 라운드가 지속될수록 몸이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고 유튜브 영상에서 보던 온갖 자세들을 혼자서 연습해 나갔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딱 일주일을 샌드백도 스파링도 없이 쉐도우만 했다. 3개월 전부터는 루틴에 약간의 웨이트도 넣었는데 손목이 아프니 웨이트도 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스쿼트 같은 하체 운동만 했다. 묘한 시너지가 생겼다. 손에 힘을 빼니 무게 중심이 아래로 더욱 내려갔고 하체운동을 함께하니 중심이 견고해졌다. 그 위에서 허리도 어깨도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아파야 했구나. 아프니까 힘이 빠지는구나.


  내게 결함이 있다는 걸 알고 나면 사람은 자연스레 힘을 뺀다. 아내에게 잘못을 했다는 걸 아는 남편은 알아서 잘하기 마련이다. 내가 불완전한 아빠라는 걸 인정하고 나면 아들에게 윽박지르는 일이 줄어든다. 살면서 어떻게 하면 힘을 빼나, 내가 됐든 남이 됐든 인생을 쳐다보며 그런 고민을 한 적이 많았는데- 손목이 아픈 초보 복서가 되고 나니 그 요령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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