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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잽잽 Jun 05. 2023

프로 복서가 되려고요

마흔 살의 복싱일기 -13

  오늘 한 가지 결심을 했다.

  프로 복서가 되기로 했다. 


  비웃어도 좋다.(근데 누가?) 나도 프로 복서가 뭐하는 사람인지 잘 모른다. 어떤 과정과 관문이 필요한지 찾아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냥 그러기로 했다. 그러기로 했으니 최선을 다 할 것이다. 그것이 결심의 전부다. 코치님에게 말했을 때, 코치님은 비웃지 않았다. 그걸로 됐다.


배신의 연속인 인생의 약속들


  물론 난 아직 실력이 한참 모자랄 것이다. 프로 복서가 되는 길은 힘들고 또 위험할 것이다. 그래도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물론 예전에 세웠던 숱한 목표들과는 성질이 아주 다르다. 10대, 20대, 30대 초반에는 어떤 목표든 다 이유가 있었고 그 목표를 이뤘을 때 내게 가져다줄 현실적인 보상이나 혜택들이 명확했다. 지금은 그런 게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가면,
대학에 가서 취업을 하면,
취업을 해서 열심히 살면,

  가정과 가정과 가정법의 연속에 인생을 쳇바퀴처럼 돌리고 뒤돌아보니 사실은 조금 속았다는 기분이다. 관계대명사로 길게 늘어진 영어 독해 지문을 읽다보면 정작 첫머리가 기억 안나는 요상한 기분이랄까.  물론 열심히 해서 그 결과를 누린 것들이 있다.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릴 수 있었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길의 초입에서 세상이 내게 약속했던 것들과 실제 삶은 사뭇 달랐다. 물론 세상이라는 사람이 내게 와서 싸인해준 적은 없지만 말이다.


   수능만 치면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세상은 너무 컸다. 취업만 하면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자본주의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직장에서 인정받으면 무언가 성취감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성취감 뒤에는 멍에처럼 허무함과 무기력감 나아가 외로움까지 이어졌다. 무엇보다, 속절없이 나이만 먹어갔다.



결심하기 참 좋은 나이, 마흔


  마흔쯤 되면, 무엇이 이뤄진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게 시간이다. 나는 이게 그냥 나이가 들어가는 아저씨의 무력한 고백이구나 생각했는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오히려 목표를 세우기에 더없이 좋은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프로복서가 되려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도,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서도, 내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서도 아니다. 물론 언젠가 아들 앞에서 멋진 경기를 보인다면 뿌듯하기야 하겠지. 하지만 뒤따르는 모든 보상 없이, 지금의 내 삶을 굴러가게 하는 가장 순수한 목표 하나를 세워보기로 하는 것이다. 아내와 아들을 위해서도, 직장을 위해서도, 어머니 아버지를 위해서도 아닌 오직 나 혼자만을 위한 목표 말이다.


  그래도, 프로가 되려면 뭔가 지금과는 달라져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어 코치님께 물었다.

빠밤빰 빠밤빰. 세상살이 결국 내가 어떤 영화 속에 살고 있나 정하기 나름.


  코치님 그러면 훈련 강도를 높여야 하지 않나요?


  아 그건 그때쯤 가서 많이 높이시면 되고, 지금처럼 꾸준히 하시면 돼요. 프로가 되는 게 급한 건 아니잖아요?


  맞다. 급할 것도 없다. 오십에 되면 어떻고 육십에 되면 어떤가. 혹은 안되면 뭐 어떤가. 나이 마흔에 프로 복서가 되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 내 마음의 근력이 아직 남아있다면 그걸 계속 단련시켜가며 살아가보는 거지뭐. 


  무엇보다, 무슨 일이됐든 '프로'가 된다는 건 아직도 나에겐 가슴 뜨거운 어떤 호칭인 것 같아서 말이다.

  프로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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