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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잽잽 Feb 08. 2024

반복이 차이를 만든다

마흔 살의 복싱일기-14

  마지막 글을 쓴 지 반년이 지났다. 갑자기 왜 글을 안 쓰게 됐는지 나 스스로 궁금하지만, 사실 글을 멈추는 데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다. 글을 쓰는 데 이유가 필요할 뿐. 오늘 아침 메일함을 열었는데 어떤 독자분께서 "복싱 연재는 이제 안 하시나요?" 라는 편지가 와있었다. 사실 조금 황송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글을 쓸 만한 핑계는 충분한 것 같아서 오랜만에 다시 글을 쓴다.


멈추지 않은 단 하나의 행위, 복싱


  반년 동안 글을 쓰지 않았지만, 복싱은 계속했다. 사실 글을 멈출 즈음 약간의 권태기가 왔다. 그렇다고 복싱장을 안 나간 건 아닌데 원래 계시던 코치님도 바뀌고 나도 뭘 더 해야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게다가 극 I 성향이라 새로운 코치님께 이것저것 가르쳐달라고 말 붙이는 데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 그사이 스파링 실력은 정체되고 맞는 건 적응이 되어갔지만 알수록 맞는 게 부담스러워졌다. 하지만 그 상태로 그냥 계속 했다.


  유튜브 속 튜토리얼도 따라해보고 이노우에 나오야의 경기를 수십 번 돌려보면서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상상 속에 슉슉 복싱장을 뛰어다녔다. 하지만 계속 그저 '반복되는' 느낌이었다. 줄넘기를 하고 쉐도우를 하고 샌드백을 치고 체력훈련을 하고, 매번 같은 일을 계속 했다. 어느 시점엔 그냥 이대로 계속 내 건강에 도움되는 정도의 운동을 하는 게 나쁠 건 없다며 위로하며 나아갔다.


이정영 선수가 깨우쳐준 삶의 교훈

  그러다 유튜브에서 이정영 선수를 보게됐다. 얼마 전에 UFC 데뷔전에서 승리한 바로 그 선수. 사실 알고리즘이 추천해서 보게 된 거지만, 보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타이틀을 보고 이름이 낯익다고 생각했는데, 이정영 선수는 10년쯤 전 내가 일때문에 만난 적이 있는 앳된 고등학생이었다.


  그때 그 '아이'가, 지금 저렇게 대단한 몸과 투지로 링 위에 올라와 상대를 노려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잠시 대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내 그 긴 시간 그가 '반복'해왔을 어떤 것에 대해 깊은 감동이 몰려왔다. 10년 전 그를 주짓수 도장에서 만나고, 실력을 쌓기 위해 스스로 학교 레슬링부 훈련에 참가하고...그런 모든 과정을 잠시 봤었다. 그리고 그는 아마 그 태도를 지금까지 반복했을 것이다. 한 가지 일을 하기에 얼마나 긴 시간인가. 나는 그 긴 시간 무얼 반복했을까.


차이를 만들어내는 반복


  물론 많은 사람들이, 특히 직장인들은 10년 간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반복되는 일상이다. 그것을 지키고 해내는 건 위대한 일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반 이상의 강제에 의한 것이다. 외력이다. 밖의 누군가에 의해 반복되는 것과 내 스스로 반복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직장인의 권태기는 도약으로 곧장 이어지지 않지만, 운동의 권태기는 그것만 참아내면 도약이 기다리고 있다.


  이정영 선수에게 자극을 받고 난 뒤부터, 조금씩 근력운동을 추가했다. 특히 몸으로 주먹을 치는 게 익숙해지지 않는 것 같아 하체운동을 조금씩이라도 계속했다. 뒷근육이 약한 것 같아 평생 못해본 턱걸이에도 꾸준히 도전했다. 처음에는 한 개를 겨우 올라갔다. 이제는 일곱 개까진 거뜬하다. 몇 세트로 나눠 기필코 스무개를 매일 채운다. 그저 매일 매달리고 매일 앉았다 일어났을 뿐인데, 철봉을 잡을 때 내가 내 몸을 온전히 쥐고 있다는 느낌이 점점 들기 시작했다. 복싱 스텝을 밟을 때 내가 미끄러지거나 기우뚱대는 게 아니라 내 주먹을 던지기 위해 무게중심을 옮기는 느낌이 서서히 들었다.


  물론, 도약은 아직이다.

  늘 스파링하는 분들이나 새로운 코치님과도 이제는 안면을 트고 더욱 가까워져서 실력이 늘었다는 평가를 받지만, 여전히 1라운드 1분 30초 정도가 지나고나면 내비게이션 꺼진 자동차처럼 불안하게 움직인다. 가긴 가는데 어디로 가는지 이 길이 맞는지 모르는 그런 불안 말이다. 하지만 조금씩 도약이 머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이건 자만이 아니라 그저 다음 단계로 내가 옮겨갈 수 있을 것 같은, 제자리에서 높이 뛰기 직전에 대퇴부와 하체에 실리는 어떤 그런 기분좋은 긴장감과 비슷하다. 얼마나 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스스로 반복한 시간이 만들어내는 결과적 차이를 자랑스럽게 느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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