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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잽잽 Jul 22. 2024

우울할 땐 우울한 나를 봐

마흔 살의 복싱일기 -18

"우울할 때일수록 자기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세요."


메타인지니 자기객관화니. 어려운 말들이 쉽게도 통용되는 세상이다. 유튜브만 틀어도 온갖 분야의 전문가(입네)들을 모두 만날 수 있다. 한 시간짜리 강의도 있고 1분짜리 숏폼도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세상에 이렇게 정답이 있었구나 싶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것도 심지어는 행복해지는 방법도 말이다.


정답지가 저렇게 펼쳐져있는데 왜 대부분 오답만 마킹하며 사는 걸까. 마흔 살이면 이제 그래도 절반쯤은 살았으니 저런 해설을 쉽게 이해할 법도 한데. 여전히 어렵다. 깜짝 놀랄만큼 많은 비밀이 공유되는 세상이지만, 정작 많은 사람들은 하루하루의 풀이가 점점 어렵다. 특히 가장 쉬워보이는, 모든 과목의 1단원 같은, 자기의 감정문제가 그렇다. 풀고 또 풀어도 틀린다.


나도 그럴 때가 있다. 이상하게 그런 날은 월요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난해한 월요병이다. 다만 예전엔 그저 출근해야 한다는 그 사실 자체가 피곤하고 귀찮은 게 컸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무기력의 무게추가 조금 다른 쪽으로 기우는 느낌이다. 급성 월요병에서 만성 월요병으로 변한달까. 월요일이 되면 시간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는 사실이 질린다.  한 주를 즐겁게 힘차게 행복하게 보내 무사히 일요일 밤을 맞이했지만, 또 한 주가 훅훅 뒤따라 붙으니 어딘가 쉴틈이 없는 느낌이다. 하루가 아니라 일곱 날을 짊어지는 기분이다. 아이를 키우고부터 더 그런 느낌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저출생 대책 중 한 달에 한 주 씩 쉬게 해주는 게 어떤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연유야 어찌됐든, 그런 월요일은 아침부터 기운을 내려해도 자꾸 실패한다. 노력하면 할수록 더 실패한다. 맛없는 음식을 어떻게든 먹어보겠다고 숟가락 가득 퍼서 넣다보면 자꾸 흘리듯 아침부터 예기치 못한 실수가 생긴다. 냉장고에 넣을 음식과 꺼낼 반찬을 헷갈린다든가, 샤워를 하다 샴푸통을 떨어트려 발에 찧는다든가, 아이에게 쓸데없이 짜증을 낸다든가 하는 일이 그렇다. 살아가려는 의지와 그런 의지에 질린 의지의 실랑이가 월요일 아침마다 반복된다.


얼마 전까진 그런 실랑이에서 살아가려는 쪽이 백전백패였다. 작은 착오에도 나의 인지력을 비관하고 아들에게 내는 짜증은 불필요한 화가 되었으며 그런 날 아침 작게나마 사놓은 주식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세상 모든 게 나를 외면하는 듯했다. 별 것 아닌 것들이 모여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바뀌었다. 오답에 대한 질타가 아니라 해설이 되었다. "너, 살아가고 있구나!"


'얼마 전'은 좀 더 구체적으로 동생이 이 세상을 떠나고난 뒤부터다. 고맙게도 동생은 나를 데리고 저 높은 하늘까지 한 번 날아올라가주었다. 너무나 가깝고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나 말도 안되게 일찍 세상을 떠나면, 나도 함께 잠시 세상을 떠날 수 있다. 높고 먼 곳에서 지금의 나, 지금의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모든 순간들이 얼마나 작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아마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마지막인지 시작인지에 그런 말들이 있었던 것 같다. 달나라에서 본다면 이 모든 인간들의 투쟁과 전쟁이 그저 하찮은 벌레들의 다툼보다 작아보일 것이라고 말이다. 


오늘(월요일) 아침도 어김없이 날이 흐리고 기분은 우울했다. 우울감이 찾아올 때 운동을 하라느니, 반신욕을 하라느니 일단 사람을 만나라느니- 모두 맞는 말인데 그 사이가 하나 필요하다. 우울의 이유를 조목조목 '인정'하는 것이다. 살아가는 게 힘들면, 일단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아 오늘이 월요일이어서 우울하구나

아 오늘 비가 와서 우울하구나

아 오늘 출근해야 해서 우울하구나

아 오늘 아들한테 짜증내서 우울하구나

아 오늘 주식이 떨어져서 우울하구나


고생을 치하할 필요도 위로할 필요도 없다. 인정이다. 정답을 이렇게나 다 알려주는데도 오늘도 틀려버린 나의 오답에 세모 표시를 하는 정도의 노력이다.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의 마음이다. 그랬구나 이래서 틀렸구나. 우울을 만드는 모든 정황들에 짓눌려 '나는 우울하다'고 X표를 치지 않고, 나를 안쓰럽게 보는 저 멀리의 누군가가 되어 '아 너는 이래서 힘들구나'고 스스로에게 세모 표시를 해주면- 딱 한 단계씩 옮겨갈 수 있다.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고 밥을 차릴 수 있고 아들을 힘차게 안을 수 있다. 소나기 내리는 시험문제지보단 세모표가 돼어있는 문제를 한 번더 들여다보기 마련 아닐까. 해결되진 않지만 시간을 들이고 궁리하며 나아갈 수 있다. 많이 틀리면 어떤가. 끝까지만 다시 보면 되지. 나의 경우 아들과 껴안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더 이상의 노력이 필요없어지고 자연스레 일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복싱 스파링을 하다 가끔 그로기 상태에 빠진다. 늘 헤드기어를 끼니 실신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세상이 흔들린 적은 몇 번 있다. 체급 차이가 많이 나는 상대에게 카운터를 맞으면 높은 곳에서 시멘트 바닥에 떨어진 것처럼 뇌가 '텅!'소리와 함께 흔들린다. 뇌가 흔들리니 모든 게 혼란스럽다. 시야도 어지럽다. 그런데 나는 복싱 실력에 비해 그럴 때 잘 대처한다. 등을 보이거나 고개를 숙이거나 경기를 포기한 적이 없다. 왜냐면 난 그럴 때 죽을 힘을 다해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아, 너 지금 x라 아프구나

아, 너 지금 진짜 제대로 맞았구나

맞아 너 지금 진짜 제대로 맞았어


그래, 그래서 뭐 이제 어쩔껀데.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비틀거리는 내가 어디선가 보이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그제서야 상대가 보인다.


월요일의 그로기 상태를 무사히 마친 모두를 축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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