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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준 Aug 10. 2023

캔자스 2

해외 생활

큰 고모와 아버지는 형제자매 중에서도 동기간 우애가 각별하셨다. 아버지는 누님께 부탁을 하셔서 큰 고모댁에 기거하도록 결정되었다. 사실 나는 사촌들이 있는 삼촌 집에 머물고 싶었지만 숙모님들 눈치가 보였다. 아버지는 며칠 후면 아들을 남겨 둔 채 혼자 한국으로 돌아가시는 일정이었다. 그동안 큰 고모는 동생인 아버지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다니셨다. 아버지는 약간의 용돈을 내 손에 쥐어주시고 떠나셨다.


큰 고모님은 슬하에 자식이 없어 한 집에 둘만 살게 되었다. 큰 고모님 댁도 아파트였는데 목조 건물로 지어진 이층 구조였다. 이층 방을 내가 쓰기로 했는데,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삐걱되는 소리가 났고 큰 고모님은 그 소리를 매우 싫어하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캔자스는 강력한 토네이도가 자주 발생하는 지역으로 유사시 대피를 위해 인위적으로 건물을 단층으로 짓고 자재도 가급적 목재를 사용한다고 다. 사람들은 목조 건물은 무너져도 틈새로 사람이 빠져나올 수 있고 덜 다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 학교 개학을 안 해서 대부분 시간을 고모댁에 머물고 있었는데 점점 눈치가 보였고 하루하루가 깝깝했다. 학교가 개학하면 통학을 해야 하는데 이동 수단도 마땅치 않았다. 삼촌에게 용기를 내서 사용하고 계신 여분의 중고 차량 한 대를 부탁했다. 아버지가 주신 용돈을 먼저 드리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조금 더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큰 고모님께 생활비도 매월 일정액을 드릴 심산이었다.


삼촌의 소개로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찾았다. 원래 학생 비자(F1)로는 일을 해선 안되지만 삼촌의 지인인 한국교포가 경영하는 빨래방에 불법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당시 최저 임금이 시간당 4불 25전이었는데 내 처지를 고려해 현찰로 4불만 받기로 했다. 빨래방을 처음 봤다. 50 평 가량의 가게에 수십대의 세탁기와 건조기가 돌아가는데 산업혁명시대의 공장 같았다. 어쨌든 난생처음으로 달러를 벌게 되었다.


미국에서 한동안 살려면 두 가지가 필순데 SSN(Social Security No)과 운전면허증이었다. SSN은 그 당시 F1 비자 소지자에게도 부여되었는데 한국으로 치면 주민등록증 번호와 비슷한 것이었다. 이 번호가 없으면 미국 땅에서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다. 다음은 운전면허증이었다. 한국에서 국제운전면허증을 만들어 왔지만 유효기간도 제한되어 있었고 여권 크기의 국제면허증을 꺼내면 다들 쳐다보는 게 싫었다. 미국에선 다들 신분증으로 운전면허증을 사용했다.


캔자스시티는 한국 교포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 아니었다. 둘째 고모가 미국인과 결혼해서 1960 년대에 이민 왔을 당시만 해도 마을에 한국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고 했다. 도시 위치도 미국의 거의 한가운데인데 대부분 백인들이었다. 이런 곳에서 한국어로 된 운전면허 필기시험 족보를 입수했다. 처음 건네받았을 때 보물 지도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정답만 달달 외웠다. 필기시험을 한국에서 치를 때보다 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림 by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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