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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준 Aug 03. 2023

괌 2

봉선화

새벽  시 즈음 강풍과 폭우가 차츰 잦아들자 호텔 측은 투숙객들을 소산 시키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구관에 숙박했었는데 태풍 피해로 건물이 군데군데 붕괴되어 신관으로 옮기라는 안내에 따랐다. 아내와 함께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으로 불안한 가슴을 진정시키며 신관의 배정된 방으로 엘리베이타를 타고 올라갔다. 20층이었다. 온몸의 피곤함이 순식간에 밀려왔고 눈을 붙이려는 찰나, 귀를 찢을 듯한 사이렌 소리가 신관 건물을 울렸다. 건물이 심하게 흔들렸다. 정말 이러다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았다. 잠든 아내를 흔들어 깨우고 20층에서 계단으로 뛰다시피 1층 로비로 내려갔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충혈된 눈빛으로 가운을 걸치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강풍으로 건물이 흔들거려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고 호텔 측은 설명했다. 이제 괜찮으니까 각각 배정된 호실로 되돌아가라고 했다. 방으로 올라와 잠을 청했지만 새벽 내내 건물은 흔들리다 말다가를 반복했다.


'차라리 날 죽여라, 이놈들아!'


잠을 설치고 초췌한 모습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폭풍우는 많이 가라앉은 듯했다. 배가 고팠다. 어제 오후 1시부터 물 이외는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다. 밖으로 나가 상황을 살펴보니, 호텔 내 입주한 대부분의 가게는 해안가와 가까워서 바닷물이 밀려와 있었고 사람들이 가게 밖으로 물을 퍼내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호텔 부대시설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아내의 발걸음이 딱 멈췄다. 가방 가게 앞이었다.


'70% OFF'


라고 적힌 푯말이 내 눈에 들어왔다. 침수로 인해 살짝 손상된 값비싼 브랜드 가방을 깜짝 할인 행사로 내놓았다. 평소 아내는 보석이나 비싼 옷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데 유독 가방에는 애착을 갖는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듯한 이곳에서 브랜드 가방을 득템 했다며 활짝 웃는 아내를 보니 정말 가방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호텔 뷔페식당으로 갔다. 음식 가지 수가 많이 줄었고 어제 아침 메뉴가 그대로 나왔다. 들려오는 소문에 다른 호텔은 단수와 음식 제공이 불가능해 투숙객을 전부 퇴실시켰다고 다. 조금 비싸지만 여기로 오길 잘한 것 같았다. 뷔페식당은 투숙객들로 가득 찼다. 피곤하고 민낯을 들어낸 지친 표정이었다. 내일이면 휴가가 끝나는데 우리를 구해줄 특별기 운항 소식은 아직 감감했다. 회사 출근하면 화를 낼 준비가 되어있는 듯 한 지점장과 깐깐한 선배들 얼굴 볼 생각을 하니 우울했다.


빈자리를 찾아 허겁지겁 음식을 날라서 먹고 있는데 낯익은 노랫말이 피아노 반주에 맞춰 울려 퍼졌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스티비 원더를 연상시키는 외국인이 한국 가요를 부르고 있었다.


'꽃 피는 부산항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가슴이 먹먹했다.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고향 노래를 태풍이 할퀴고 간 이국 땅, 괌에서 들을 줄이야. 심금을 울리는 식사를 마치고 호텔 방에 들어왔다. TV를 켜보니 섬을 후려친 태풍 피해 소식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그런데 태풍 이름이 요 며칠동안 한 짓과 안 어울리게 참 예뻤다.


'봉선화'


드디어 우리 부부를 데려갈 괌 특별기가 편성되었다. 짐을 꾸려 아내와 함께 호텔에서 제공한 승합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가는 길의 시내 모습은 참혹했다. 부서진 건물 잔해, 불에 탄 주유소, 뒤집힌 자동차, 땅에 길게 누운 전봇대 등 아마도 전쟁이 나면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괌 공항은 섬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공항 직원들이 질서를 안 지키는 승객들을 인상을 쓰며 통제했다. 우리 부부는 난민처럼 대합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비행기를 기다렸다. 피곤에 절어 고소공포증 걱정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한참을 기다린 후 비행기에 탔는데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급히 오느라 기내식을 준비하지 못했단다.


'집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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