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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준 Aug 16. 2023

취직 1

연수 시절

적성에 안 맞는 상과대학 과목을 꾸역꾸역 이수하고 4학년 졸업반이 되었다. 4학년 1학기가 개강하는 봄부터 취업의 열기는 시작되었다. 학점이 괜찮은 애들은 연봉이 높은, 주로 종합금융회사, 은행 등 금융권으로 취업했고 고만고만한 애들은 제조업체로 들어갔다. 1995년 당시는 대기업 취직이 썩 잘되는 마지막 무렵이라서 상과대학 학생들은 한 명당 최소 3 장 이상의 특채 원서를 받고 비교적 손쉽게 취직하는 형편이었다. 창피하게 나는 그 대상에서 해당이 안 되었다.


한때 올림픽 꿈나무 학번으로 불리는 쌍팔년도에 입학해서 재학 도중 1년을 휴학하고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는 입학 동기들보다 1년이 늦은 데다 취직까지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사람들 만나기도 거북해서 일단 보습학원 영어 강사로 취직했다. 3개월 즈음 지나니까 89 학번 후배, 총대(과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다. 요지는 이랬다.


"형 때문에 우리 과 이미지에 타격받을까 신경 쓰인다. 항공사 원서를 줄 테니 제발 취직 좀 해주세요"


이미 취직한 사람에게 제발 좀 취직하라니? 순간 울컥했지만 신경 써주는 후배 성의가 고맙기도 해서 지원서를 썼다. 그런데 쓰다 보니 항공사 특채 원서가 아니라 대기업 그룹 '공채' 원서였다. 영어와 한문 시험도 치러야 했다. 그룹 공채 시험에 합격하면 연수과정의 성적과 적성에 따라 여러 계열사로 배정되는 식이었다. 녹록지 않을 것 같았다.


후배 총대에게 부탁해서 다른 한 군데 원서를 더 받아냈다. 유명한 화재보험 회사였는데 연봉이 제조업체보다 훨씬 높았다. 돈에 눈이 멀어 원서를 쓰고 서울 가서 면접을 봤는데 운 좋게 합격했다. 부산역에서 밤기차 타고 새벽에 서울역 도착해서 푸석푸석한 얼굴로 면접 보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아무튼 해냈다. 부산에서 나고 자라서 서울은 처음이었는데 설렁탕 국물이 뽀얀 게 아주 맛있었다. 소문에 서울은 설렁탕에 간간히 우유를 붇는다고 들었다. 우유를 붇던 뭘 붇던 내 입맛에는 딱 맞았다.


졸지에 두 군데 옵션이 생겼다. 유명한 화재보험 회사와 항공사가 있는 대기업. 그런데 공교롭게도 연수 시작 일자가 같았다. 밤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생각이 바뀌었다. 새벽, 서울역에 내렸다. 그리고 대기업 그룹 공채 회사 방향으로 발을 내디뎠다. 왜 그랬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냥 어떤 기운에 이끌려 간 것 같다.


연수원은 용인에 있었다. 그룹 공채 동기들과 몇 달 합숙을 하는 과정이었는데 전방에서 군복무 시절 생으로 처음 들어봤던 전라도 사투리가 첫날부터 난무했다. 사실 그때까지 전혀 몰랐다. 내가 들어온 회사가 호남의 간판 기업이란 것을. 그룹 공채 동기들이 몇백 명은 되었는데 남자 애들은 대부분 호남 출신으로 보였다. 서울말을 하는 애들도 본적은 호남 출신이 많았다. 이 분위기 무척 낯설었다.


합숙의 첫날 아침이 밝아왔다. 전날 심신이 너무 피곤해서 눈을 감았는데 몇 초 후 날이 샌 느낌이었다. 우리 방 남자 동기들의 주요 대화는 어제 프로야구팀의 승패였다. 내 옆에 누워잔 애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 주어, 목적어 생략하고 '어제 이겼냐'라고 물어왔다. 나는 당연히 부산 '롯데 자이언츠'를 염두에 두고 큰 목소리의 경상도 사투리로 '당연히 우리 롯데가 이겼지'라고 대답했다. 순간 깜박했다.


방에 있던 동기들 9명 모두가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우리 방은 나 빼고 전부 '해태 타이거즈' 팬이었다.



그림 by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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