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애완동물, 특히 개나 강아지를 데리고 공항에 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친자식처럼 안고 오기도 하고 유모차에 태워서 오기도 한다. 애완동물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언뜻 착해 보이기도 한다. 우리 지점 여직원들도 대부분 애완동물을 좋아해서 예쁜 강아지들을 보면 사족을 못쓴다. 나 역시 귀엽고 순한 개를 보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강아지들의 운송이다. 규정상 주인과 함께 기내로 탑승하는 개는 크기와 개수가 정해져 있어서 나머지는 항공기 하단 부분, 수하물 칸에 실린다. 고객이 가져온 케이지에 개를 집어넣고 혹시 모를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케이지 문을 케이블 타이로 꽁꽁 묶고, 케이지 전체에 또 그물을 씌운다. 그다음 이 개는 수하물 검색 장소로 옮겨져 엑스레이 심사를 받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개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케이지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고 공항이 떠나가도록 소리 높여 짖는 개, 얼굴을 실룩거리며 온몸을 벌벌 떠는 개, 비행기 타는데 익숙했는지 너무나 순종적인 개 등이다. 일단 케이지에 들여놓기만 하면 웬만한 개들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얌전해진다. 케이지 안에 힘없이 웅크리고 앉은 개와 간혹 눈을 마주치면 안쓰럽기 그지없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늘 곁에 두고 싶은 것 같다. 사물이든 생물이든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볼 수 있도록 말이다. 좋아하는 대상이 사물이면 모르겠지만 생물이면 상황은 달라진다. 생물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간은 자기 위주로만 생각하고 행동한다. 생물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동물원, 식물원, 수족관을 만들어 가둔다. 그렇게 해놓고선 잘 돌보고 있다며 흐뭇해한다. 참으로 어리석고 무자비하다.
신영복 선생의 책중에 '사람만 보지 말고 그 사람의 처지를 같이 보라'는 글귀가 있다. 인간의 욕심을 채우더라도 그 생물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배려해 보자. 가능하다면 동물원과 식물원, 수족관 등 생물을 가두고 있는 시설을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보고 싶을 때는 찾아가서 보면 되지 않을까. 꽃을 보고 싶으면 꽃을 꺾어 화병에 꽂아두지 말고 산과 들로 나가서 보는 건 어떨까 싶다. 해마다 미국에서는 크리스마스날 트리를 만들기 위해 헤아릴 수 없는 나무들이 잘려나간다고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새겨 본다면 크리스마스트리 만들기에 그렇게 열을 올릴 필요가 있을까.
수많은 개들이 주인과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떠난다. 그들이 모두 주인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빈다.
사진 by 해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