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전 즈음 가깝게 지냈던 친구와 모임에서 크게 싸운 이후 '친구란 무엇일까' 한동안 생각하며 괴로운 날을 보냈다. 당시 나는 해외주재원으로 근무하였는데 잠시 귀국해서 같은 고교출신의 대학 동기생 모임에 갔었다. 동기생 중에는 학창 시절 유독 시간을 함께 많이 보냈던 친구들이 서너 명 있었는데, 한 친구는 그동안 모임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함박눈을 맞은 것처럼 백발로 변한 이 친구 모습에 많이 놀랬다.
학창 시절 똑똑하고 잘 생긴 외모의 이 친구는 우리 동기생들 중에서 취직을 제일 먼저 했었다. 휴학을 해서 아직 학생인 나와 몇몇 애들은 근사한 양복을 입고 회사에 출근하는 그 친구가 부러웠다. 친구는 월급을 타면 학생들이 가기엔 부담스러운 식당에 데려가서 비싼 음식도 곧 잘 사줬다. 나도 빨리 취직해서 그 친구처럼 되고 싶었다.
그렇게 우린 사회인과 학생으로 1년을 보내고 다음 해 하반기에 나도 운 좋게 취직을 했다. 사회 초년생들인 우린 각자 회사 생활에 녹초가 되다시피 해 만나는 날이 점점 줄었다. 몇 년이 흘러 나는 서울 본사 발령이 났다. 저녁에 우리 세 친구가 모였다. 이 친구는 진지한 표정으로 서울 가길 잘했다고, 다른 한 친구는 월급쟁이 거기서 거긴데 서울까지 갈 필요가 있냐고 했다. 내가 정하는 것도 아닌데.
서울 본사와 객지 생활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 부산은 명절과 양가 부모님 생신일만 겨우 내려갔다. 가끔 핸드폰 문자로 이 친구들과 서로 안부를 물었지만 횟수는 점차 줄었고 그렇게 우리는 아주 조금씩 멀어져 갔다. 그 대신 직장 동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동고동락하는 동료들이 서서히 친구의 빈자리를 채워갔다.
한날 이 친구로부터 늦은 밤에 전화가 걸려왔다. 이 시간에 전화가 오면 대체로 좋은 일 보단 사고나 초상 같은 안 좋은 일이 많다. 심호흡을 한번 한 뒤 받았는데 전화기 넘으로 술기운이 느껴진다. 잔뜩 취한 목소리다. 직장을 그만뒀다는 얘기였는데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그 친구가 빨리 전화를 끊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가 먼저 끊을 수 없었다. 우린 친구니까.
나중에 다른 친구에게 들어보니 여자 문제였다. 직장 동료를 좋아해서 사귀었는데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았다고 했다. 이후로 친구는 급속히 무너졌다. 직장도 관두고 술만 퍼마셨다. 한 밤중에 전화가 걸려와 술을 아무리 마셔도 죽지 않아서 이상하다고도 했다. 내일 출근하려면 푹 자야 하는데 이 친구 전화를 받으면 언제 끝날지 모른다. 옛날 다정했던 친구 목소리가 점점 공포스럽다.
세월이 흘러 나는 해외 지점을 개설하러 하와이로 떠났다. 회사 업무로 잠시 귀국했는데 그날 동기생 모임에서 이 친구를 봤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즈음, 퀭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시비를 걸어왔다. 내가 취직을 못해 빌빌거리고 있을 때 자기가 술도 사주고 입던 양복도 줬다고 했다. 처음엔 듣고만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가만히 있으니까 나에 대한 험담 수위는 올라만 갔다. 결국 참지 못한 나는 폭발했다.
친구란 무엇일까. 그 친구 눈엔 자기보다 못한 내가 출세한 것처럼 보였을까. 그래서 억울했을까. 사실 그 당시 해외지점 개설 업무로 나의 심신은 말할 수 없이 고단했다. 야박한 말만 쏟아내는 그 친구가 너무나도 서운했다. 그런데 요즘 혼자 지내면서 그 친구 생각이 난다. 그때 내가 좀 더 참을 걸 하고 후회가 된다. 밥은 먹고, 잘 살고 있는지. 이찬원 가수의 '시절인연'이란 노래를 들을땐 유독 그 친구 생각이 많이 난다. 학창 시절, 잘 생긴 외모에 서글서글했던 성격. 이것도 시절인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