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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준 Oct 26. 2023

안개

공항

시월 중순부터 안개가 잦아졌다. 이른바 안개 시즌이다. 황금 들녘을 가득 메운 벼를 추수하기 시작해 텅 빈 논 바닥이 보이기 시작할 때, 안개는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 안개는 모든 벼가 사라진 논 바닥에 물기가 메말라갈 때 즈음인 11월 중순에  어디론가 떠난다. 늘 그렇듯이.


작년부터 공항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나로선 긴장해야 할 시즌이 온 것이다. 항공기가 안전하게 이착륙하려면 적정 시야 확보가 필수적인데 짙은 안개는 항공기 운항에 치명적인 요소다. 물론 바람의 세기나 방향도 항공기 이착륙에 영향을 미치지만 활주로 방향을 변경해 시도한다면 웬만해서는 운항이 가능하다. 하지만 안개는 다르다. 사람이나 기계가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냥 스스로 걷힐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그저께 안개로 비행기가 2시간 이상 지연되어 출발했는데, 어제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 또다시 안개가 자욱하다. 회사 단톡에는 근무 타입이 새벽 스케줄인 직원들의 바짝 긴장한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서둘러 출근해야 한다.

집에서 공항으로 가는 길에도 안개가 자욱하다. 이럴 때일수록 속도를 늦추고 집중해야 한다. 차 안에서는 늘 음악을 듣는다. 그날의 날씨와 내 감정을 고려해 곡을 선택한다. 비가 올 때는 김보경의 '빗속을 둘이서', 요즘처럼 안개가 짙을 때는 '헤어질 결심'의 OST, '안개'를 들으며 운전한다. 자기감정을 담아 진심으로 부르는 노래를 좋아한다. 이런 곡을 들으면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아 운전 속도가 리듬에 맞춰 내려간다.


미호강을 건너는 다리 위를 지날 때 건너편에서 오는 차들이 보였다. 자욱한 안갯속에서 흑백 영화 속 필름 같은 헤드라이트 불빛만 보였다가 이내 사라지는 광경이 비현실적이다. 공항 초입의 황금 들판과 전투기로 가득 찬 공군 부대도 안갯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출근할 때 늘 보였던 것이 안 보이면 마치 다른 곳으로 가는 것 같다.


공항에 도착해서 종합통제실 상황을 확인해 보니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공항 출발장은 수학여행을 떠나는 풋풋한 차림의 학생들로 가득 차 있다. 비행기가 지연되는 말든 개의치 않고 들뜬 모습이다. 소리를 지르고 뛰어다니는 남학생들, 깜찍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는 여학생들로 공항이 떠들썩하다.


안갯속에 웅크리고 앉은 비행기를 바라보며, 바람이 안개를 데려가길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사진 by  인프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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