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샌드백이 되는 연습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젠 맞는 연습이 시작됐다.

by Go on

"실장님, 103동 14층 2억 5천 맞죠?"

김 실장이 물었다.

주연은 한 템포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주날짜는요?"

"... 4월 중순요."
"아니에요. 그건 104동 13층이고요. 외우셨다면서요."


아침부터 비꼬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벽히 외우지 못한 주연의 실수였기에 고깝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 순간 울리는 전화벨.

김 실장은 본인과 상관없다는 듯 얼른 창 밖을 바라봤다.


주연은 떨리는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믿음 부동산입니다."

"207동 17층 물건 있는 건가요?"

"아, 네네 있습니다."

"날짜는 언젠가요?"


외웠는데.

종이에 순서대로 적어놨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머뭇거리는 사이,

상대방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 김 실장님 연결해 드릴게요."


출근한 지 일주일이 넘었건만,

전화 한 통에도 흔들리는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어젯밤 퇴근하며 A4용지에 빼곡히 적었던 물건들.

동, 호수, 평형 타입, 날짜, 보증금...


빈손을 수화기처럼 쥐고,

주연은 소리의 톤을 바꿔가며 말을 반복했었다.

"안녕하세요. 믿음 부동산입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딸이 방 안에서 말했다.

"엄마, 자격증 공부할 때보다 더 열심히 하는 것 같아."


하지만, 지금 주연의 머릿속 숫자들은

자기네들끼리 엉켜서 춤을 추다 숨어버렸다.


"지금은 많이 헷갈리시죠?"


대표는 애써 웃으며 말을 건넸다.

"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답은 확실하게 해야 해요.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깔끔하게."


대표는 갑자기 책장에 있는 장부 한 권을 꺼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근데 이게 익숙해지려면... 지금부터 제가 하라는 걸 하세요.

이건 우리 손님들 번호예요.
하루에 20통씩 전화하세요.

별일 없는지, 집주인이면 혹시 물건 내놓으실 일 있는지.

방문했던 손님이면 집 구할 일 없는지.
거기 메모 쓰여있으니까 어떤 손님인지 파악해서 전화하세요.

그러다 보면 다... 익숙해질 겁니다. 오케이?"


'20통요...?

내가... 전화 걸어서 뭘 어떻게 한다고요...?'


눈앞이 아득해졌다.

정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이 주연의 책상 위에 장부를 갖다 줬다.


"오늘부터 하루에 20 통입니다. 그리고 전화 끝나면 상가 돌아다니면서 명함 돌리고 인사하세요."


말문이 막혀버린 주연 옆에서

김실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믿음 부동산입니다~"

"... 네?"


예상했어. 기죽지 말자.


"ㅇㅇㅇ동 ㅇㅇㅇ호 임대인되시죠. 만기가 내년인데 혹시 매매 생각 있으신가 해서 연락드렸어요."


"없습니다."

(뚝)


이건 양반이었다.


그 후로도 전화는 이어졌다.

어떤 사람은 인사도 하기 전에 끊었고,

어떤 사람은 "뭐라고요?"하고 쏘아붙였고,

어떤 이는 "어후, 재수 없어"라고 말하며 끊어버렸다.


20통의 전화를 마치고 나니,

말들이 몸에 박힌 것처럼 얼얼했다.


손에 땀이 맺혔다.


"천 실장님, 이제 상가 다녀오세요."


대표가 무심하게 말했다.


주연은 명함 한 뭉치 들고

부동산 옆 상가 건물로 향했다.


가게 앞까지는 갔다.

하지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에라, 모르겠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아.. 안녕하세요. 전 옆 건물에 믿음 부동산 실장인데요. 혹시 가게 내놓은 실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


하필, 그 가게 사장이 바로 앞에 있었다.


"가게를 왜 내놔요? 장사 안되라는 소린가? "

"아, 아니요. 혹시 나중에라도 가게를 옮기시거나 넓히시게 되면..."


"됐어요. 나가주시죠."


얼굴이 붉어진 주연은 가게 밖으로 빨리 걸어 나왔다.


나 같아도 저랬을 거야.

얼마나 재수 없었을까.


주연이 생각했던 공인중개사의 일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그냥 집 보여주고, 계약하고, 서류를 쓰는 일.

그저 그런 줄 알았다.


사무실로 돌아온 주연은

용기내어 말을 꺼냈다.


"대표님, 저... 상가는 좀 힘들 것 같고

오피스텔부터 배우면 안 될까요?"

대표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일단, 명함부터 꽂고 오세요."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덜 친절했다.

주연은
샌드백처럼, 세상을 정면으로 맞고 있었다.





이미지 제작 : Chat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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