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시작은 절박함이었다

가족에게서 무너진 삶, 가족이 세워줬다.

by Go on

그날은 처음으로 손님을 데리고 오피스텔을 보여주는 날이었다.

'인사만큼은 잘하자.'

주연은 상냥한 얼굴로 손님을 데리고 오피스텔로 향했다.


오피스텔 1층.

물건을 소개할 상대 부동산을 기다렸다.

즉, 주연은 손님을 데리고 온 부동산이었고,

상대 실장은 물건을 맡고 있는 부동산이었다.


익숙한 얼굴이 바쁘게 걸어왔다.

몇 년 전, 주연이 이 오피스텔을 보러 왔을 때 응대했던 바로 그 실장이었다.

다행히, 주연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월드부동산 실장입니다.
이 집은 저희가 꾸준히 관리하고 있어요."


그 말이 떨어지자, 머리가 띵해졌다.


지금... 그 말을 우리 손님 앞에서 한다고?


그건 업계에서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

중개는 '누가 손님을 데리고 왔고, 누가 물건을 맡고 있는가'가 분명해야 한다.

상대 실장이 자신의 부동산을 소개하는 순간,
우리 손님이 곧장 그쪽 부동산으로 직접 가버릴 수도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텐데.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 굳이 말을 꺼냈다는 건...

주연을 무시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주연은 손님 앞에서 따지지 못했다.

김 실장을 통해 주연의 어리숙함이 이미 알려졌는지도 모른다.

상대 실장은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철저히 주연을 무시하고 있었다.


이 오피스텔은,
예전에 주연이 '손님'으로서 찾아왔던 곳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남겨주신 유산으로 월세 수익을 받기 위해

오피스텔을 알아보던 시절.


그때 돌아다녀봤던 이 복도 위에서

주연은 손님이 아닌, 설명도 제대로 못하는 중개사로 서있다.


'나는 왜 이 길을 선택했을까.'


문득, 3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그 일은,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서 시작됐다.

남동생이었다.


그 무렵 남동생은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


"이번에 새로 들어가는 업종이 커.

내가 알아보니까, 수익률이 진짜 말도 안 돼.

그냥 담보대출해서 조금만 도와줘.

한 달에 이자 넉넉하게 챙겨드릴게."


주연이 부부는 처음엔 주저했다.

하지만 남동생은,

평소 누구보다 우애가 깊었던 사이였다.

한 번만 해보자고 했다.

"가족끼리 못 믿겠냐"는 말에,

주연은 결국 남편을 설득했다.


한 번이 두 번이 되었고

두 번째에는 더 많은 대출을 받기 위해

남동생은 저축은행 대출까지 권했다.

추진하는 사업이 5개월 안에 확정된다면서

꼭 갚겠다는 차용증까지 작성하였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약속대로 이자가 들어왔다.

그다음 달은 며칠 늦더니,

세 번째 달부터는 두 달에 한 번씩, 석 달에 한 번씩으로 바뀌었다.


당연히 주연은

남동생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졌지만

남동생에게 돌아오는 말은,

"지금 사업 확장 중이라 계속 회의해야 하니까 끊어. 이거 계약하면 이자 한꺼번에 다 보내줄게."


하지만, 그 후로도

들어오는 이자는 없었다.


이른바, 폰지 사기였다.


믿었던 가족이

가장 먼저 주연을 무너뜨렸다.

친정엄마는 아들이 잘되어야 한다며

주연에게 참으라고 했다.


참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대출이자를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도,

엄마의 눈에 보인 건 아들뿐이었다.

남동생 주변에 피해자가 하나둘씩 늘어갔고,

엄마는 본인 명의의 재산을 팔아

그들에게 갚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엄마의 도리고

아들을 살리는 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도리'와 '살리는 길'안에

주연은 없었다.


밥을 먹지 못한 채 누워 있으면

퇴근한 남편이 주연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내가 있어.
우린 잘 될 거니까 밥 먹어야 해.

애들 생각해서라도 건강해야 해."


남편의 속은 오죽했으랴.

하지만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그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주연의 곁을 지켜주었다.


주연은 대출이자를 감당할 수 없어

급매로 집을 팔고

아이들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했다.

미분양 아파트.

전세가 싸게 나왔다는 이유 하나로 들어간 곳이었다.


위층도, 아래층도 비어 있었다.

겨울엔 바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무리 난방을 해도 올라가는 건 관리비뿐이었다.


남편은 지하철을 세 번 갈아타고,

마을버스를 20분 타고 들어와야 했다.


그렇게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는 남편을

주연은 늘 창문 너머로 지켜봤다.


춥고 긴 하루를 건너온 남편을 마주할 때마다,

주연은 미안함에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런데도 남편은 매번 웃는 얼굴로 들어왔다.

주연이 너무 미안해하지 않도록.


고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은

매일 아침 남들보다 한 시간 더 일찍 일어나야 했다.


너무 이른 시간,

무겁게 눈을 뜨는 그 아이들에게

고단한 아침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차 뒷 좌석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이들.
그 모습을 보는 순간마다

주연은 가슴 깊이 저려왔다.


아이들이 감당하고 있는 피로가

모두 주연의 몫 같았다.


아이들 학원도
비싼 과목부터 정리를 해야 했다.


영어 과외 선생님에게

사정이 생겨 수업을 못하겠다고 전화를 드렸다.


이미 아이들을 통해 사정을 알고 있는 듯한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어머님. 애들은 그냥 보내세요. 지금 그만두면 안 돼요.

제가... 수업비 반만 받을게요.
다른 분들에게는 말씀하지 마시고요."

주연이 너무 죄송스러워 말을 잇지 못하자,

선생님은 덧붙였다.


"어머님. 저도 그런 경험이 있어요...
그런데요, 그게 다 지나가더라고요.

어머님, 아이들 보시면서 힘내세요."


주연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았다.

가장 믿었던 가족에게 버림을 받고,

잘 알지 못했던 사람에게 위로받는 순간이었다.


주연은 뭐라도 해야 했다.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차 소리, 사람소리도 들리지 않는 텅 빈 단지 안.

거실의 벽시계 초침소리까지 울려 퍼지는 집 안에서

주연은 뭐라도 해야 했다.


며칠 전, 아이들을 학원에 데려다주다
딸아이 친구 엄마와 마주쳤었다.


서로 안부를 묻다가 그녀가 부동산에 근무한다는 걸 알게 됐다.

수입도 좋고 사람 만나는 게 재미있다고 했다.


부동산? 공인중개사?


굳이 시험보지 않고 보조원으로도 근무할 수 있다고 했지만,

이다음에 부동산을 차릴 생각이라면

무조건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날로, 서점에 가서 공인중개사 책을 펼쳐봤다.


알 수 없는 말들과 숫자들.

과목은 왜 그렇게 많은지.


'내가... 이걸 할 수가 있을까?'


딸 친구 엄마는, 학원을 다니거나 인강으로 공부해 보라고 말했었다.


극 내향인 주연은,
학원 대신 인강을 택했다.


그 추운 집에서,
주연은 책을 폈다.


공인중개사 교재.

법률행위, 물권행위, 단독행위...

모르는 말뿐이었다.

한 줄, 한 줄이 벽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매일 그 앞에 앉았다.

책위에, 주연의 절박함이 겹겹이 쌓이고 있었다.


그렇게, 아주 조금씩.

자신을 다시 쌓아 올리는 마음으로

주연은 공부를 했다.


'나 때문에 고생하는 우리 가족들...
꼭 내 힘으로 다시 돌려놓겠다'


절박함이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거절당하고, 눈치를 보고,

전화 20통에 숨이 막히는 하루.

그리고 무시당한 순간까지.


그런 날들 앞에서

주연은 또다시 스스로를 다독였다.


시작은,

절박함이었다.

그리고 매일,

그 마음 하나로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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