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그 말이 내 앞을 비췄다

작은 인정은 큰 위로가 되었다

by Go on

갑자기 바빠졌다.

근처에 대기업 계열사의 사옥이 완공되면서,

오피스텔 월세를 구하려는 문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입사 열흘이 넘은 주연은

아직 한 건의 계약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퇴근하려던 이틀 전, 대표가 가볍게 말했다.


"이제 천 실장님, 계약서 쓰실 때가 됐는데?"


방문손님, 예약손님에게 집을 보여주는 일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계약으로 이어진 적은 없었다.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질문 폭탄에는 여전히 당황했고,

그럴 때면 김 실장이 무심하게 소설책을 읽다가 슬쩍 대답을 대신해주곤 했다.


주연은 자꾸 비교됐다.

김 실장은 거의 나가지도 않고 앉아서 소설만 읽는데,

계약은 해나가고 있었다.


'혹시 내가 손님에게 설명을 잘 못하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너무 친절해서 부담을 줬던 걸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날도 평범한 하루였다.

문의전화와 방문손님 응대로 오전을 보내고

사무실을 비울 수 없어 대표와 김 실장에게 먼저 식사하라고 했다.


혼자 남은 사무실에 한 모녀 손님이 들어왔다.

전주에서 올라온 모녀였다.

딸의 입사 때문에 오늘 당장 월세를 구해야 한다고 했다.


주연은 열심히 설명을 하고

손님과 같이 집을 보러 갔는데,

이미 다른 부동산에서 본 집이라고 했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이미 다 봤다는데... 어떡하지...?'


모녀 손님은 다른 부동산에 가보자며 그냥 가버렸다.


점심을 먹고 돌아온 대표와 김 실장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어머. 그럼 그냥 가게 놔두셨어요?"

"실장님. 부동산은 한 번 나간 손님은 다시 안 옵니다. 무조건 붙잡으셨어야죠."


대표와 김 실장이 번갈아가며 말했다.

주연은 더 작아졌다.


'내가 또 뭘 잘못한 걸까.

그럼 다 봤다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대표는 덧붙였다.

손님을 데리고 나가기 전, 조건에 맞는 집이 더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어야 한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다른 부동산에 전화해서 또 물건이 없는지 파악했어야 한다고 했다.

좀 더 알아보겠다고 하고 전화번호라도 받아놨어야 한다고 했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주연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이 답답했다.


대표는, 이제 계약서를 쓸 때가 되지 안 않냐는 말을 또 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잘하겠습니다."


그 순간,
사무실 문이 열리며

아까 들어왔던 모녀 손님이 다시 들어왔다.


모녀 손님은 마음에 드는 집을 다른 부동산에서 봤지만,

주연의 부동산을 통해 계약하고 싶다고 했다.

주연이 가장 열심히 설명해 줬다는 이유였다.


예상하지 못한 일에 대표는 당황하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주연의 첫 계약이었다.


계약이 끝난 후, 손님은 한 번 더 집을 보고 싶다며 주연과 함께 다시 나섰다.

"다시 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주연이 웃으며 인사하자,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실장님. 오늘 지방에서 올라와 여러 군데 다녀봤거든요. 근데 실장님이 제일 성의 있게 설명해 줬어요.
인상도 참 좋으셔. 괜히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주연은 무언가 안에서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매일 지적당하고 움츠렸던 이곳에서

처음으로 '주연'이라는 사람 자체를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어머니는 딸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우리 애가 이제 막 사회생활 시작해서,

사실 오늘 계약하고 내려가려니 마음이 좀 놓이질 않았어요.

딸이 이 동네에 대해서 아는 게 없거든요.

혹시라도 뭐 물어보면, 언니처럼 잘 좀 챙겨주세요."


그날의 계약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낯선 사람이 건넨 다정한 말 한마디가

매일 작아지기만 했던 주연의 마음을

조용히 일으켜 세웠다.


'정말 이 일이 나와 맞는 걸까.'

수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의심하던 시기에

그 말은 마치,

'잘하고 있어요. 계속해도 돼요'

그렇게 속삭여주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주연의 마음속 어딘가에 아주 작고 따뜻한 불이 켜졌다.


그 불빛 하나로, 주연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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