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은 나를 믿고 있었다
이제는 아침이 두렵지 않았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며 가슴이 무거웠고,
현관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하지만, 숫자를 웅얼거리며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했던 날들은 지나갔고
음악을 들을 여유까지 생겼다.
현관문을 활짝 열고 청소를 하며,
스스로가 조금은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처음엔 이 청소가 조금 창피했지만,
이제는 당당했다.
남들의 시선이 아니라, 그 시선을 마주하는 주연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주연은 이제 이곳에서 적응해가고 있었고, 그게 스스로 대견했다.
계약도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예전에 버벅거리며 상담해 드렸던 전화 손님,
연 이틀 방문해서 여러 오피스텔을 돌아다니며 진 빠지게 했던 손님.
그 손님이 추천한 다른 손님까지
모두 다시 연락을 줘서 계약하게 되었다.
처음엔 전화만 받아도 목소리가 떨렸고,
집을 안내할 때 손님이 예기치 못한 질문을 하면
말문이 막히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런 실수들이 쌓이면서 점점 익숙해졌고,
대인공포증과 전화공포증도 조금씩 사라져 갔다.
이제는 계약을 성사시키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요즘 잘하시네요. 이제 감 좀 잡으셨네."
대표가 칭찬을 하기 시작했고
손님들이 주연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해준 것을
사무실 안에서 큰 소리로 말해주기도 했다.
그때의 김 실장 표정은
주연이 민망하리만큼
어떠한 호응도 없는 무표정이었다.
그날 이후,
김 실장은 식사 시간이 되면 주연보다 먼저 나가기 시작했다.
예전엔 당연한 듯 같이 나가던 점심시간이었지만
일부러 주연을 피하고 있었다.
주연은 김 실장의 그 미묘한 거리감에 눈치를 채고 있었다.
대표가 주연을 칭찬할 때마다,
김 실장은 못 들은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사무실에는 차가운 정적이 흘렀고,
그 냉랭한 기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대표는 그런 공기를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주연을 향한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이런 상황이 익숙한 것처럼, 김 실장의 반응을 무시하듯 자연스러웠다.
첫 출근일에, 그 적립카드를 받았을 때부터
김 실장의 변덕은 계속되어 왔다.
주변 실장들이 주연을 대하는 미묘한 거리감도
돌이켜보면 모두 김 실장의 이중적인 행동과 맞물려 있었다.
주연에게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다.
어릴 때부터 열심히 노력하면 칭찬을 받는 게 당연했고,
누군가의 질투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달랐다.
자신이 잘 해낼수록, 노력할수록
옆에 있는 김 실장은 사무실 곳곳에 날카로운 기운을 퍼뜨렸다.
처음엔 단순한 오해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뭔가 실수를 했나?’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주연은 깨달았다.
이 부동산에 전 직원들이 오래 머물지 못하고 자꾸만 나가는 이유가
단순한 일이 아니란 걸.
그 중심에는 김 실장이 있었다.
주연은 많이 신경 쓰였지만, 애써 무시했다.
일에만 집중하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몸과는 다르게, 마음은 계속 불편했다.
그 무렵, 월급날이 다가왔다.
높은 금액의 전세 두 건을 포함한
계약도 몇 건 성사시켰고
지난달보다 확실히 성과가 좋았기에,
이번에는 조금의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첫 달과 다름없는 기본급뿐이었다.
주연은 조심스럽게 대표에게 정산 내역서를 요청했다.
"실장님. 정산서는 무슨... 지금 마이너스예요, 마이너스."
주연이 아무리 계산을 해도 분명 더 받을 수 있는데
대표의 말투는 무심하고 단호했다.
"전 그저 내용이 궁금해서요. 제 계산이랑 달라서요."
대표는 고개를 저으며
"흑자 나면. 그때 정산서 드릴게요."
면접 때의 약속과는 다른 말이었다.
인센티브를 확실하게 챙겨줄 거기 때문에 기본급이 낮다고 했었다.
주연은 그 말을 믿고 빨리 업무에 익숙해지고자
갖은 노력을 다 했었다.
쉬는 시간 없이 오피스텔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빨리 익히려 했고
퇴근하고 나면 잠이 들 때까지
손님 전화받는 연습을 했었다.
그러고 보니, 근로계약서도 안 썼다.
대부분의 부동산은 근로계약서라는 개념이 없었다.
각 부동산마다 고용의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곳은, 기본급 없이 오로지 인센티브로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연은 기본급에 총수입의 몇 프로를 더한 금액을 받는 계약이었다.
그 기본급은 최저시급의 1/3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즉, 오로지 실적에만 기대해야 하는 구조였다.
그렇다면, 총수입이 얼마인지 알아야 할 텐데
대표는 정산서 공개를 거부한 것이었다.
주 6일 근무에 공휴일까지 일하는 힘든 업무.
이 월급을 받자고 일한 건 아니었다는 생각보다도,
왜 이것밖에 못 받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날,
우연히 알게 된 사실.
김 실장의 기본급이,
주연보다 훨씬, 아주 많이 높다는 것.
알고 보니 대표와 김 실장은
지인의 지인사이였고,
처음부터 조건은 정해져 있었던 것이었다.
일을 하든 말든,
김 실장은 어차피 보장받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유튜브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도,
당당했고, 무례했다.
퇴근 후, 주연은 남편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조심스럽게 털어놨다.
"여보...
나, 지금 다니는 부동산 계속 다녀야 할까?"
주연은 원래 남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었다.
항상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었다.
남동생의 사기 사건 전까지는.
그 사건 이후로
주연은 절대적으로 남편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던 그녀가,
엄마와 남동생에게 상처받고 방향을 잃었을 때
손을 잡고 이끌어 준 사람은 남편이었다.
사회생활을 해보지 못한 주연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그때마다 남편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주연이 감정에 치우쳐 오판할 때에도
남편은 현실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조언은 주연이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런 남편에게조차 주연은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끈기 없이 포기하려는 사람으로 보일까 두려웠다.
다들 힘든 사회생활을 버텨내는데,
자신만 못 견디는 사람처럼 보이기 싫었다.
웬만한 일은 견디다 보면 나아질 거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2년의 공부기간 동안 묵묵히 응원해 준 남편과 아이들에게
두 달도 안 다니고 그만두는 아내와 엄마로 보이기 싫었다.
남편과 아이들은
주연 때문에 갖은 고생을 다 했는데,
이제 겨우 두 달 고생했다고 포기하며 실망을 안겨줄 수는 없었다.
첫 출근 전 날 밤에,
아이들은 정성 들여 쓴 편지와 머그컵을 선물했었다.
엄마의 생애 첫 출근을 축하한다며
엄마 스스로 해낸 공부와 취업이
너무나 자랑스럽다고 했었다.
주연은 사무실에서
그 머그컵을 보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버텨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남편에게 월급에 대한 대표의 태도와 말을 전한 후,
남편의 표정은 확 굳어졌다.
"그만둬.
월급이 투명하지 않은 곳은 결국 사람을 지치게 해.
아무리 열심히 해도,
기준이 불분명하면, 노력한 만큼 보상받지 못하고 계속 속이 상할 거야.
정산서를 안 주는 건 말이 안 돼."
주연은 가만히 남편의 말을 들었다.
"정산서가 명확해야 신뢰할 수 있는 거야.
신뢰가 없는 곳에서 오래 일할 수는 없어.
당신이 열심히 한 걸 알아주는 곳, 투명한 곳으로 가."
남편의 확신에 찬 목소리는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어떤 아내고, 어떤 엄마여야 한다는 무게가
주연을 누르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주연은 그냥 아내와 엄마면 됐던 거였다.
그날 밤, 주연은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긴 시간 동안 그녀는 처음으로 마음속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가족들은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그 믿음이 주연의 두려움을 지워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결정할 용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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