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안고 나아가다
"실장님. 오후에 저랑 분양상가 좀 가시죠."
"분양상가요...?"
며칠 전, 불투명한 정산서 때문에 퇴사 결심을 했었지만
그게 그렇게 또 쉽지 않았다.
이직할 곳을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퇴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곳이 마음에 안 들어도
새로운 곳에 또 적응해야 할 용기가 주연에겐 없었다.
남편은 그런 주연의 결정을 존중해 주며
언제든 나오고 싶을 때에는 나오라고 했다.
이것 또한 경험이 될 거라고 해줬다.
그런 마음을 먹고 출근한 주연에게
대표는 뜬금없이 분양상가로 가자고 한 것이었다.
이제야 겨우 오피스텔 다 외우고
손님응대에도 자신감이 붙었는데...
"오피스텔은 김 실장 혼자 해도 되니까,
4시에 손님이 온다고 하니 실장님이 좀 모시고 가시죠.저는 따로 가겠습니다."
대표는 후에 다른 약속이 있어서 따로 가겠다고 하며. 상가 광고 팸플릿을 책상 위에 놨다.
팸플릿 위에 빨간 마커로 동그라미가 크게 그려져 있었다.
'편의점 / 1층 / 임대수익 / 8.3억"
"이거 보시고 참고하세요. 이따 손님들이 물어보면 너무 모르고 있으면 안 되니까.
이제 여기 거의 매일 간다 생각하셔야 합니다. 월급이 적으니까 정산서 달라고 하셨잖아요. 이런 거 하면 월급 쭉쭉 올라갈 겁니다. 아시죠? 상가 한 건당 수수료."
8.3억
분양 상가는 수수료가 상당했다.
하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오피스텔 중개에서 제외되다니.
심지어 그 분양 상가는 차로 1시간여를 가야 하는 신도시에 있었다.
차가 막히면 1시간 반을 훌쩍 넘기는 거리였다.
어제 퇴근할 때, 김 실장은 주연 앞에서
"오늘 대표팀하고 약속이 있어서요."
묻지도 않는 얘기를 했었다.
둘이 어제 같이 밥을 먹으며,
김 실장이 오피스텔은 혼자 하겠다고 한 건 아니었을까.
정산서를 달라고 해서였을까. 월급이 적다고 불평하는 것처럼 보였던 건가.
오늘 주연에게 오피스텔 예약한 손님들마저
김 실장에게 번호를 넘겨야만 했다.
이건 아닌 거 같아 대표에게 말하려던 순간,
주연과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 두 명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상가 매수 관심녀와 그녀의 친구였다.
둘을 뒷좌석에 태우고 주연은 한 시간 동안
그녀들의 폭풍 질문에 시달렸다.
어디 사냐, 언제부터 공부했냐, 애들은 몇 살이냐, 상가는 해본 적이 있느냐...
심지어 나중에는 어떤 노래도 틀어달라고 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손님과 한 공간 안에 갇혀있긴 처음이었다. 내향적 성격인 주연은 차가 막히지 않길 바라며 일일이 웃으며 대답했다.
'친절하게 대답해야 계약으로 이어질 거야.'
주연은 그렇게 믿고 열심히 대답해 줬다.
1시간을 달려 도착한 상가 건물 앞.
넓디넓은 공사판.
건물들이 우후죽순 지어지고 있었고,
그 옆에는 고층 아파트들이 거의 다 지어져 있었다.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먼지가 뽀얗게 일었고,
그 가운데 컨테이너로 만든 분양사무소가 보였다.
“진짜 부자들은요, 땅 파고 건물 올라가는 거 보고 투자하지 않아요.
땅파기 전, 그림만 보고 투자합니다.
저희가 이렇게 홍보할 때 얼른 잡으세요.”
분양사무소 직원의 말에
손님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계약금은 얼마를 넣어야 하냐.
임대수익은 얼마냐. 주변에 몇 세대냐.
근처 상가 임차는 어떻게 맞춰졌냐...
질문이 쏟아지고, 당장 계약할 듯한 분위기.
사무소 직원들은 바쁘게 커피와 과자를 날랐다.
편의점 자리는 너무도 귀해서
아무한테나 내놓지 않는 물건이라며
(오늘 처음 데려간 손님인데, 거의 '아무나'아닌가...?)
지금 바로 결정하지 않으면
6시에 오는 손님이 결정할 거라고 압박했다.
그들의 막힘없는 설명을 들으며,
주연도 돈이 있으면 이런 물건은 잡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흥분한 손님은
지금 당장 송금할 금액이
하루이체 한도에 걸린다고 하며 집에 가서 송금하겠다고 하니
옆 친구가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둘은, 갑자기 상의할 일이 있다며 잠깐 컨테이너를 나갔다.
분양사무소 안은
이제 계약이 눈앞에 온
사무소직원들과 부동산 대표가
서로를 쳐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분양사무소 직원은 대표에게 두 잔 째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사장님. 드디어 오늘 결실 맺으시네요. 근데 이 물건은 진짜 좋아. 아시잖아. 어후 내가 돈만 있으면 이거 잡는다 잡아."
대표는 이곳을 여러 번 왔다 갔던 것 같았다.
'그럼 여태 혼자 다녔는데, 왜 나를 데리고 왔지?'
10분 후 들어온 그녀들은,
“남편은 아무것도 몰라서요. 혼자 결정하기가 어렵네요. 집에 가서 상의하고 연락드릴게요.”
그 말 한마디에
6시가 넘어서 다시 부동산으로 출발했다.
'정말 이 손님이 계약을 할까.'
주연은 상기된 얼굴로 운전대를 잡았지만,
뒤에서 하는 그들의 대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야 너 진짜 이거 할 거야?"
"아니 미쳤냐. 그냥 본 거지."
"근데 그렇게 할 것처럼 말했냐"
키득키득 웃는 소리.
주연은 순간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백미러로 그들의 모습을 봤다.
창밖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들의 얼굴이 참 태연해 보였다.
'그냥 본 거라고? 그러면 왜 그렇게까지 질문을 했지?'
주연은 일부러 못 들은 척, 표정이 굳어지는 걸 애써 감췄다.
하지만, 주연이 뻔히 들을 걸 알면서도
뒤에서 그렇게 떠드는 무례함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뭐지... 그냥 이걸 왜 보러 다니지?
이 먼 곳까지 왜 왔지?
아까 분양사무소에서 열심히 질문은 왜 한 거지?'
질문 하나하나에 꼼꼼하게 대답해 주고,
분양사무소 직원이 설명할 때도 눈을 반짝이며 경청하던 그 모습이
주연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냐. 그래도 말은 저렇게 해도, 계약을 할 수도 있어.'
퇴근 시간 차들과 엉켜,
1시간 반이나 걸려 사무실에 도착했다.
7시 반.
사무실 앞에 도착해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를 건넸고,
차 안에서 수다 떨다 잠이 들었던 그들은
번뜩 깨며 말했다.
“어차피 퇴근하실 거니까 우리 좀 데려다줘요.”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부탁하는 뉘앙스조차 없이.
심지어 주연의 집에서 20분이나 더 가야 하는 곳이었다.
“전 집으로 바로 가야 해요.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사무실로 들어오니,
김 실장은 이미 퇴근한 뒤였다.
기름값을 받는 것도 아니었고,
오피스텔 중개에서 밀려났지만
상가 계약이 성사되면 월급이 오를 거라는 생각에 참았다.
다음 날.
일찍 출근해 청소를 하고 있는데,
대표가 들어오며 말했다.
“실장님, 어제 우리 손님들이랑 무슨 일 있었어요?”
주연은 어리둥절했다.
“아뇨. 별일 없었는데요.”
“좀 전에 내가 전화했거든요. 남편분이랑 상의하셨냐고.
그랬더니 실장님 때문에 자기네가 차 안에서 힘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순간 주연은 머리끝이 서는 것 같았다.
“사무실로 오는 내내 자던데요?
그리고 도착해서 자기네 집까지 데려다 달라길래 제가 거절했고요.
계약할 거냐고 친구가 물어보니까, 미쳤냐고 안 할 거라던데요.”
"아... 참나, 무슨 기사인가?
잘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대표는 주연을 이해해 줬지만,
주연은 그들이 괘씸했다.
전화해서 뭐가 기분이 나빴냐고 따지고 싶었다.
어차피 계약도 하지 않을 사람들.
남의 차 타고 멀리 다녀왔으면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지,
그러긴커녕 내 탓을 한다고?
"음... 내일 오전 10시, 모레 오후 5시에 다른 손님 올 겁니다.
저는 내일 오후 손님 데려갈 거니까, 오전 손님은 실장님이 데려가세요.
어제 분양팀이 설명하는 거 들으셨죠?
실장님도 이제 그렇게 하실 줄 알아야 합니다."
대표는 손님이 주연을 기사로 봤냐고 했지만,
정작 대표가 주연을 기사로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 대표님, 저는 상가 중개보다는 오피스텔을 하고 싶어요."
주연이 용기 내어 말했다.
매일 왕복 2시간 넘게 운전하며 분양상가를 다닐 수는 없었다.
"실장님. 우리 부동산에 오피스텔 담당이 두 명이나 있을 필요 있나요?
오피스텔 아무리 해봐야 월급 오르는 건 힘들 겁니다. 아시잖아요. 우리 사무실 월세에 관리비에.
무조건 분양상가 장 열렸을 때 뛰어들어야 합니다."
주연은 원래 아파트 중개를 하고 싶었다.
이 부동산에 들어와서 아파트 쪽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떠올랐다.
새로 알아가야 할 물건들, 부동산들, 손님들…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용기가 주연에게는 없었다.
정산서 때문에 퇴사를 결심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익숙한 환경에 머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이 숫자들, 손님들이 머리에 익혀지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다른 부동산 직원들에게
억지웃음 지어가며 얼굴 트기 까지가
얼마나 힘들었던가.
그런데 이걸 다시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주연은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자신을 자꾸 주저앉혔었다.
하지만 노력해도 돌아오는 건 무례한 손님들의 뒷말과
월급 내역도 명확하지 않은 정산서였고
무엇보다도, 상황은 앞으로도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주연은 이제 마음을 굳혔다.
그동안 눌려있던 불안감이,
이제는 결심으로 변해 있었다.
주연은 더 이상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기로,
익숙함을 뒤로하고 나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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