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텨낸 시간, 다가온 기회
갑자기 전화벨과 긴장에서 해방되었다.
어제 결기 있게 퇴사한다고 말하고 사무실을 나오는데,
김 실장은 주연에게
그동안 너무 수고했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응...? 뭐지? 왜 울지... 너무 좋아서 우나?
그렇게 남의 눈물이 가식적으로 보인 건 처음이었다.
석 달만에 처음으로 늦게 일어나는 평일이었다.
하지만, 이 고요함을 아무 생각 없이 누릴 수는 없었다.
숫자에 잼병인 주연은
감을 잃어버릴까 봐 초조해졌다.
감을 잃기 전에 다른 부동산 자리, 아파트를 전문으로 하는 단지 내 부동산을 찾아야 했다.
'한국공인중개사협회'에 들어가서
구인 목록을 검색했다.
주연이 사는 곳 근처 여러 부동산들이 있었지만
나이와 경력에서 이미 커트당했고,
경력 무관인 곳에도 전화해 봤지만
역시나 그들은 아파트 경력 유무를 따졌다.
주연은 아파트 경력이 전무했기에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 아무 데도 못 가면 어쩌지...'
초조함이 밀려왔다.
'오피스텔 경력 3개월'
이대로라면 또 오피스텔을 가야 하는 건데
그건 또 별로였다.
그냥 꾸준히 안정감 있게 근무할 곳이
주연에게는 아파트일 거 같았다.
주연에게 공인중개사 길을 알려줬던 지인에게도 카톡을 보냈다.
'나 벌써 그만뒀어요^^ 혹시 아파트 단지 내 부동산 괜찮은 곳 있을까요?'
그녀는 바쁜지 카톡을 읽지 않고 있었고
주연은 부동산 구인사이트를 계속 뒤졌다.
'어떡하지...'
짧은 한숨을 쉬고 있는데, 늦게 일어난 딸이 방에서 나왔다.
대학생이 된 딸도
수업하랴, 아르바이트하랴 힘들었을 텐데
석 달 동안 주연이 퇴근하고 나면
저녁을 차려주곤 했었다.
부동산은 일주일에 하루 쉬었기 때문에
하루 쉬는 날인 일요일에는
주연은 꼼짝도 안 하고 누워있었다.
"엄마가 밥 차려줄게."
불위에 김치찌개를 올리니, 딸이 간을 보며 말했다.
"엄마. 난 엄마가 이렇게 집에 있는 것도 괜찮아.
김치찌개가 더 맛있는 거 같아."
그깟 석 달 일하면서
집안 일도 남편과 아이들에게만 맡겼었다.
잘 챙기지 못한 미안함이 확 밀려왔다.
가끔 딸은 주연이 출근 전에 먹을 김치볶음밥을
미리 만들어놓곤 했었다.
출근 준비하는 바쁜 아침에
식탁 위에 놓여있던 김치볶음밥과 메모지.
'아침 먹고 가. 맛이 없을 수 없는 환상의 맛ㅋ 엄마 홧팅'
항상 그 볶음밥은 양이 많아서
남길 수 밖에 없었고,
남은 볶음밥은 아이들의 점심 식사가 되었었다.
석 달 동안 딸이 차려준 밥을 먹었던 주연은
오늘 오래간만에 딸 밥을 차려주었다.
딸은 김치찌개를 뜨며
"엄마가 그랬잖아. 천천히 돌아가도 된대매. 일단 푹 쉬어."
'언제 우리 아이가 이렇게 컸지...'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아이였는데
이제는 어른 같은 말로 엄마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그때, 울리는 카톡소리.
지인의 답장이었다.
'그럼 당연하죠~ 주변에 좋은 데 하나 나와있네.
여자대표랑 실장 근무하는데, 그 실장이 나가나 봐. 얼른 지원해 봐요.
그리고 또 한 곳 있는데, 거긴 소문이 좀 별로긴 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일단은 번호 알려줄게요'
주연은 얼른 번호를 적고
네이버 부동산에 들어가서 대표의 사진을 봤다.
따뜻한 인상에 왠지 모를 이끌림이 있었다.
영업시간이라 대뜸 전화부터 거는 건 예의가 아닐 거 같아
문자로 정중하게 간단한 이력소개와 지원의사를 보냈다.
하지만 답은 없었고,
차선책이 될 수도 있다는 다른 부동산에도
문자로 지원의사를 보냈다.
하필 두 번째로 보낸 부동산에서는
바로, 저녁 7시 반에 면접 보러 오라는 답장을 받았다.
'그래. 일단 답장 오는 곳은 다 면접을 보자.'
7시가 될 때까지 주연이 가고 싶어 했던 부동산에서는 답장조차 없었고,
주연은 약속대로 7시 20분까지 다른 부동산에 면접을 보러 갔다.
그런데, 면접 보러 오라고 했던 부동산에 불이 꺼져있었다.
'응?? 내가 문자를 잘못 봤나...?'
다시 내용을 봐도 분명 "오늘 7시 반까지 오세요."라고 쓰여있었다.
전화를 건 주연.
면접을 보러 왔는데, 어디시죠? 하니
"아 그게 오늘이었나요? 내일 오세요. 12시."
말투에 일말의 미안함도 없었다.
그 무례한 말투와 태도에 분노가 올라왔다.
뭔지 모를 감정에 집으로 황급히 들어와
침대에 누워버렸다.
천장을 바라보며,
'왜 부동산 대표들은 말들을 그렇게 가볍게 하지?
그런 곳에 또 들어가서 일을 해야 한다니...'
확 짜증이 몰려왔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아까 연락 주셨던 ㅇㅇ부동산이에요."
경박하지 않은 따뜻한 목소리.
부동산 사장은 갑자기 어머니가 쓰러지셔서 하루 종일 병원에 있다가 나오는 바람에
이제야 전화를 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아파트 경력은 있으시죠?"
쿵...
'아파트 경력이 없다'라고 답변했던 오전 전화와는 달리,
"아파트 경력은 없지만, 전 금방 배우고 해냅니다. 진짜 성실하게 잘할 수 있어요. 믿어주세요."
주연은 태어나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을 어필해 본 적이 처음이었다.
첫 직장 면접에서는 눈 똥그랗게 뜨고 어버버 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자기 자신이 다 잘 해낼 수 있다고, (오래 걸리는데도) 금방 배우고 해낸다고 외쳐대고 있었다.
대표는 작게 웃으며,
"음... 어떡하지... 그럼 일단 우리 내일 봐요. 보고 얘기해요. 12시까지 부동산으로 오세요.
혹시 손님 있으면 부동산 뒤에 카페 있으니까, 거기로 가 계세요."
"네! 감사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면접 날.
11시 30분에 도착해서 부동산 근처를 둘러봤다.
한 상가에 부동산이 6개.
후문 상가까지 포함하면 10개.
바로 길 건너 단지에도 4개와
한 블럭 옆 단지에도 5개가 있었다.
'장난 아니구나. 서로 피 터지겠구나.'
카페에서 대표를 만났고,
역시 수화기 건너 받은 느낌과 다르지 않았다.
대표는 따뜻했고 차분했다.
대표는 본인의 말을 하기보다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이며 주연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오피스텔에서 배운 점을 물어봤고
주연 또한 차분히 대답했다.
항상 직장에서 무시당하기만 했던
주연의 생각이
경청되고 있었다.
아파트만 20년을 중개한 사람 앞에서
3개월 오피스텔 한 사람이 하는 말이
뭐 그리 중요했으랴.
하지만 대표는 주연의 말하는 태도와 눈빛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존중해주고 있었다.
주연 또한 흥분하지 않고
열정과 진심을 꾹꾹 담아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진심이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다행히 대표는 주연을 맘에 들어했고
지금 실장이 나가는 날이 4일 후이니
그때까지 단지를 돌아다니며
위치와 평형을 공부해 오라고 했다.
그리고 아파트 단지 특성상,
임대인과 임차인들이 수시로 부동산에 드나든다고 했다.
나이가 있으신 임대인들은
때로는 아무 일 없어도 부동산에 와서 놀다 가신다면서
친근하고 예의 있게 대해달라고 했다.
대표와 헤어지고
단지를 둘러봤다.
'이제 여기구나. 내가 일할 곳...'
출근 첫날 느꼈던 두려움이 없었다.
그냥 잘 해낼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 3개월 동안 쌓았던 경험에서였을까.
그깟 3개월이 뭐라고, 이런 자신감을 심어줬을까.
주연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쁜 경험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매일같이 수많은 손님 앞에서 얼굴이 굳어지던 시간,
누군가는 비웃듯 쏘아보기도 했고,
누군가는 주연을 무시하며 질문을 던지기도 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런 시간들이 주연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막연한 공포증을 이겨내게 해 준 것도,
막다른 골목처럼 내몰리는 상황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을 준 것도,
그 부동산에서의 시간이었다.
면접 시, 대표는 전화작업은 별로 선호하지 않지만
혹시 해야만 한다면 할 수 있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항상 소극적이고 내향적이었던 주연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빠르게 얘기했다.
"네.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첫 부동산의 경험이 없었다면
주연은 또 어리바리했을 거고
지금의 면접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쓰디쓴 경험이었지만,
그 안에서 주연은 전화기 너머 사람의 목소리와
응대하는 방법을 배웠고, 조금은 단단해졌다.
그 경험들을 살려,
이 부동산에서 진짜 잘해보고 싶어졌다.
새로 알아가야 한다는 두려움이 어느 새 사라지고 있었다.
나쁜 꼴을 또 본다 해도,
그마저도 주연을 성장시키는 경험이 된다는 걸.
그동안 무너질 듯 흔들렸던 시간들이
이제는 튼튼한 기둥처럼 주연을 받쳐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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