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함은 먹잇감이 된다
'나는 오전에 약속 있어서 나가니까, 점심은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요.'
출근하자마자 받은 대표의 문자.
흐미... 아무리 그래도 첫 출근인데
나만 홀로 있는 사무실이라니.
극복했다고 생각한 전화공포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면접 때 대표는
물건을 빨리 익히는 길은,
손님과 많이 보러 다녀야 한다고 했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주연은 이틀 전, 전 실장에게 업무를 인계받을 때
그녀가 한 말이 떠올랐다.
"대표님은 빡세게 훈련시키실 거예요."
따뜻한 미소를 지녔던 대표가
빡센 훈련을 시킨다고?
어떤 훈련일지 물어봤지만,
전 실장은 그저 웃었다.
출근 첫날, 텅 빈 사무실에 앉아
다시 물건내용을 체크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새로 오신 분이죠? 환영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헉... 뭐지...
옆 부동산의 전화였고 낯선 친절함이었다.
부동산이 이렇게 많은데,
새로 온 실장에게 이렇게 친절하다고?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주연은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상대방이 뜬금없이 물었다.
"102동 17층은 정상이에요?"
부동산에서 '정상'이라는 뜻은
입주날짜가 2개월 정도 후라는 의미다.
반대말은 '비정상'이 아니라,
'빠른 입주' 또는 '하시'라고 하며
만약 입주날짜가 한참 멀면
'긴 정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부동산끼리 보는 정보망이 있다.
거기에는 각 부동산들이 올려놓은 물건들이
단지별로 정리되어 있다.
집주인이 자신의 집을 어느 부동산에 의뢰하면,
그 부동산은 가장 먼저 해당 물건의 정보를 정보망에 올린다.
그러면 다른 부동산들도 그 내용을 확인하고,
조건에 맞는 손님을 붙여 계약을 성사시키는 것이다.
주연은 한 템포 쉬며 대답했다.
"아 네네. 정상 맞아요."
"그래도 만기가 언제인지 정확히 좀 알려줘요."
"만기라..."
주연의 손은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영화 매트릭스의 초록색 숫자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일단 제가 확인하고 연락드릴게요."
얼른 전화를 끊고 전세 만기를 확인했는데
문득 든 생각이,
이미 정보망 안에 "102동 17층 / 정상 / 입주 날짜 협의가능"이라고 쓰여있는데
왜 굳이 만기 날짜를 묻는지 궁금해졌다.
주연은 답을 주지 않기로 하고
대표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오후에 대표가 들어오자마자
"별일 없었어요?"라는 말에
"XX부동산이 102동 17층 전세 만기가 언제냐고 하더라고요."
대표는 화들짝 놀랐다.
"혹시 알려줬어요?"
"아뇨. 날짜 협의 가능인데, 대표님에게 먼저 여쭤봐야 할 거 같아서 알려주지 않았어요."
대표는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주연에게 잘했다는 칭찬을 했다.
"그게 왜 물어보냐면... 부동산이 손바뀜이 있을 때도 그렇고,
실장이 새로 들어올 때도 그렇고,
물건을 빼가는 부동산이 많아요."
"네...? 빼... 요?"
"우리가 전속으로 갖고 있는 물건도 있지만,
대부분 집주인이 한 번씩은 풀어서
부동산들이 주인 전화번호를 갖고 있단 말이지.
그다음에 아무리 주인이 우리한테만 물건을 내놔도, 다른 부동산들은 어느 집인지 추측하고 있는 거죠."
대표는 말을 이어갔다.
"물건을 푼다는 건, 주인이 여러 부동산에 물건을 내놓는다는 뜻인데,
한 부동산에 의뢰를 해놨다가 계약이 늦게 되면 주인이 초조해지잖아.
그러면 여러 부동산에 물건을 쫙 푸는 거죠."
"예를 들어, 어느 부동산한테 전세 만기를 정확히 얘기해준다? 그럼 감이 오는 거예요.
아, 그 집이구나. 그리고 곧장 주인에게 전화해서 자기네에게도 물건 달라고 하죠. 손님 있다고 하면서.
정말 고약해요. 여기가 그래요. 엄청 치열해서 정신 번쩍 차리고 있어야 해요."
주연은 어질어질했다.
'이게 전 실장이 말하던 훈련인가...'
대표는 경계해야 할 부동산 리스트를 알려주며 덧붙였다.
"아마 실장 들어왔다고,
엄청 잘해주는 척하면서 밥 사준다느니 할 텐데,
일단 내가 알려주는 부동산들은 다 조심해야 해요.
그리고 아무리 친해도 경계는 계속해야 하고..."
대표는 덧붙였다.
"하지만 이 부동산이 진짜 웃긴 게,
부동산의 최고 손님은 일반 손님이 아니라 부동산이에요.
여러 부동산들이 같은 물건을 갖고 있을 때에, 어떤 부동산에 손님을 붙일 것인가.
결국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하지만 그 안에 경계심을 늦추지는 말라는 거죠.
가까워도 안되고 멀어도 안되고."
친절하되 만만해 보이지 말고
웃되 정보를 흘리지 말며,
경계하되 인사는 잘할 것.
'아파트 경력 필수'라는 말이, 이런 뜻이었나 싶었다.
모니터 옆에 붙일 포스트잇에는 '조심할 부동산 리스트'를 쓰려다가,
결국 '믿을 수 있는 부동산 리스트'만 적기로 했다.
그게 더 빠르고 현실적이었다.
대표에게 물어볼 것이 더 많았지만
이미 뇌에 과부하가 걸린 주연은
더 이상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멘붕에 빠진 눈으로 자꾸 물어보면
'뭐 그렇게 놀라나? 아파트 근무 잘할 수 있다며'라고
생각할까 봐 거기서 그치기로 했다.
오늘은 다만,
실장이 바뀌었을 때 훅치고 들어오는 부동산을
경계하는 법을 알려준 것이니,
이제 놀랄 일은 더 많을 듯했다.
그 순간, 오전에 전세만기를 물어봤던 부동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실장님. 전세 만기요."
마치 맡겨놓은 물건 찾는 것처럼 당당한 말투.
"사장님. 정상이니까 두 달 정도 입주 생각하시면 돼요~"
"... 알겠어요."
전화기를 내려놓는 주연의 옆에서
대표는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주연은 진심과 솔직함이 있다면 세상은 언젠가 알아줄 거라고 믿고 살아왔다.
하지만 부동산은 그런 믿음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솔직하면 안 되는, 오히려 솔직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세계.
그곳에서 주연은 이제, 경계와 눈치를 배워야 했다.
불빛 하나 없는 아프리카 초원의 밤, 하이에나들이 눈빛을 반짝이며 주연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지 제작 : Chat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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