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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사랑니

by 제제

나는 일찌감치 어금니 근처가 간질간질거렸다. 이가 고른 편인데 덧니가 있어 교정을 할까 했던 적도 있었다. 어릴 때 갔던 치과에선 아직 어려서 교정은 이르다고 했다. 고등학생은 되어야 한댔다. 그때도 사랑니가 두 개는 이미 나 있었다. 나머지도 막 나올 참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나의 첫 남자친구는 초등학생 3학년 때 같은 반 남자애. 그 애 이름은 희. 여자애 같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반 애들은 계집애 같은 희가 계집애를 좋아한다며 얼레리 꼴레리 놀려댔다. 희가 좋아하는 게 나라는 걸 알았을 때는 창피하기도 했다. 희는 얼굴이 빨갰다. 하얀 피부였는데 금세 빨개지곤 했다. 귀 끝까지 빨개지는 얼굴도 몇 번 봤었다. 희가 나를 쳐다보는 눈을 자주 마주쳤다. 가끔은 오싹할 정도로 나를 계속 봤다. 초등학생들 북적거리는 교실에서 희랑 눈이 마주치면 세상이 조용해지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얼굴이 빨개진 희 눈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조잘조잘 문자로 얘기하느라 요금제는 금방 바닥이 나던 희가 기억난다. 희가 보냈던 사진 문자도 기억난다. 등산을 갔던 모양이었다. 엄청 커다란 나무 사진과 그 아래 써서 보낸 문자. 우리 사랑도 이 나무처럼 크게 잘 키워보자. 그때의 희는 사랑이 뭔지나 알고 그런 문자를 보냈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빠에게 들켜 혼이 날까 봐 답장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희는 내가 좋다고 예쁘다고 그랬다.


학부모 참관수업이 있던 날을 기억한다. 교실 뒤편에는 엄마들이 일렬로 서있었다. 그 사이에서 혼자 서있는 나의 아빠. 수업이 끝나고 부모님들과 선생님은 면담을 하러 자리를 비웠다. 나대는 걸 좋아하는 키 작은 남자애 하나가 내 앞으로 뛰어왔다. 야. 너는 왜 엄마 안 오고 아빠가 왔어? 너 엄마 없어? 고개를 푹 숙이고 병신같이 입을 열지도 못하고 울었다. 키가 나보다도 작고 까불거리는 그 애는 무척 신난 것 같았다. 들떠서 방방 뛰는 꼴에 환멸이 났다. 참관수업 다음날부터 나는 이름대신 엄마 없는 년으로 불렸다. 희는 그냥 우두커니 보고 있었다.


내가 희에게 처음으로 보낸 문자는 '미안해'였다. 그때의 나는 뭐가 미안해서 그런 문자를 보냈는지 모르겠다. 왕따 당하는 엄마 없는 애를 좋아했던 게 창피할 것 같아서 미안했던 걸까. 이제야 처음 문자를 보내는 게 미안해서였을까.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내가 한 건 아닐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냥 계속 그전처럼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빨개진 얼굴로 날 보고 있을 희가 싫어서 피해 다녔다. 그날 이후로 달라진 게 있다면, 가끔 마주치는 눈을 나보다 희가 먼저 피했다. 그땐 너무 어렸어서 누구의 잘못인지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희를 그렇게 좋아했냐고 물으면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겠지만 사전적 의미의 첫사랑에 가까웠다. 사랑이 뭔지도 모를 어린애들이 서로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눈을 못 떼는 어린애처럼. 어금니 쪽이 붓고 간질거렸다.


영구치가 나기 전에 뽑는 유치. 그것들은 모두 할머니가 집에서 뽑아줬다. 흔들리는 이에 실을 바짝 묶어놓고 뽑았던 것도 있었고, 내가 계속 혀로 건드려서 부러지듯 빠진 것도 있었다. 할머니는 그것들을 부엌 창가에 올려놓고 까치가 물어가길 기다리곤 했다. 그래야 예쁜 이가 새로 난다고 했다. 그렇게 했는데도 덧니가 난 걸 보고 할머니는 속상해했다. 또래들은 엄마 손잡고 치과 가서 뽑을 텐데 당신이 뽑아 준 게 잘못이라고 했다.


사랑을 알게 되는 나이 즈음에 난다고 해서 사랑니. 나는 사랑이 뭔지 아직 모르지만 사랑이 왜 아픈지 알게 돼서 그다지도 아픈 사랑니가 났나. 치과에서는 눕지 않고 반듯하게 났으니 그대로 써도 될 거라고 했다. 생 살을 찢고 나오느라 입에서는 한 달 내내 비린 피 맛이 돌았다. 성인이 된 지금의 나는 아직도 사랑니가 두 개뿐이다. 네 개 모두 바르게 났지만 오른쪽 사랑니는 관리가 어려워서 결국 위아래 모두 뽑게 되었다. 치과에 갔던 그때처럼 여전히 사랑니는 두 개. 뽑은 자리에는 더 이상 다른 이가 나지 않고 그 자리는 계속 비워져 있어야 한다. 버티고 참는 것도 방법이 아니다. 결국 멀쩡한 어금니까지도 충치가 옮는다. 사랑니라는 이름은 과연 얼마나 잔인한가.


사랑니는 어차피 다시 날 것이 없으니 나는 까치를 기다리지 않았나. 내가 뽑은 사랑 하나는 엄마였고, 다른 하나는 첫사랑일지도 모르겠다. 둘 다 다시는 내게 없을 거라서. 까치가 물어가게 뒀으면 기대하게 될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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