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자주 나오는 비운의 여자로 상징 격 되는 등장인물 설정. 분명 사랑해서 만났을 사이인데도 누군가는 때리고 누군가는 맞는다. 스톡홀름 증후군이나 가스라이팅일 수도 있겠지만, 자식 때문에 참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았을 땐 많이 놀랐다.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할머니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할머니는 나랑 다섯 띠 동갑, 내가 한 살 일 때는 이미 예순한 살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할머니보다도 5살이 많았다. 이제 너무 늙어서 더 이상 때리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내 키가 할머니랑 비슷해지고,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수다를 떨 수 있을 때가 되었을 때쯤이었다. 할머니도 첫사랑이 있냐고 물었다. 내가 어릴 땐 할머니는 할머니로 태어난 줄 알았고, 엄마는 엄마로 태어난 줄만 알았다. 할머니는 예끼, 어른 놀리면 못 쓴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웃었다. 웃는 할머니를 보며, 할머니가 아닌 젊은 여자였던 할머니가 궁금했다. 그때 찍었던 사진들은 어디 갔는지 기억도 안 난다고. 그게 슬펐다. 할머니는 그때의 나랑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왔다. 유복하게 살다가 어려워진 형편에 아들은 공부시켜야 하니, 딸은 시집을 보내는 것 밖엔 수가 없다고.
이름만 양반인 할아버지에게 팔려오듯 결혼했던 할머니. 10남매의 장남이었던 할아버지. 얼마나 오냐오냐 자랐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10남매의 막내인 고모할머니, 그 핏덩이를 업어 키우고 아들만 다섯을 낳았지만 시집살이는 고생스러웠다고 했다. 술, 여자, 도박 어느 것 하나 건드리지 않은 게 없었던 할아버지. 산후조리 같은 건 모르고 살았고 옆 방에선 웃고 떠드는 낯선 여자 목소리가 들렸고 허리는 끊어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밥상이 엎어지고, 걷어차이고, 감춰둔 돈을 뺏기고, 쫓겨났을 땐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자식들이 눈에 밟혀서 그러지 못했다고. 할머니는 울지 않았지만 나는 울었다. 그때 많이 울어서 이제는 더 울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할머니 왜 도망 안 가고 참고 살았어. 지금이라도 도망가면 안 돼?
/대신 너를 만났잖냐. 딸 없이 사는 거 불쌍해서 너를 보내준 줄 알았다. 너 하나 보고 사는 거지.
할머니는 그랬다. 자식들 생각하면서 버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엄마를 미워했다. 어떻게 돌잔치 날 버리고 도망갈 수 있냐고 원망했다. 당신의 옛날 얘기를 하면서도 울지 않았던 할머니는, 어린 내가 울고 있는 사진을 보면 그렇게나 울었다. 엄마 없이 혼자 앉아있는 내 어린 시절의 사진들은 언제나 자주 할머니를 울게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건너 건너 소개를 받았던 야구부 남학생이 있다. 이름은 한. 한은 아버지가 안 계셨다. 어머니와 둘이 작은 집에서 살았다. 야구를 시키려고 어머니 혼자 바쁘게 일하셨다. 야구로 유명한 고등학교를 다녔고,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좋은 대학교의 야구부로 들어가게 되어있다고 했다. 나랑 동갑인데 꿈이 확실하고 능력을 인정받은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한 달을 연락하고 만났다. 처음엔 강경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고집이 있고 호불호가 확실하고 주관이 뚜렷하다고만 생각했다. 의견이 서로 다를 때나, 본인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는 화를 냈다. 어느 날엔가 지하철 역에서 나는 뺨을 맞았다. 화를 내는 한의 모습에서 아빠가 겹쳐 보였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빌었다. 빌고 매달리고 미안하다고만 했다. 그 모습이 더 화를 돋웠던 걸까. 환승역 지하보도에서 열차를 갈아타러 가던 사람들이 나와 한을 갈라놓았다. 처음에는 쳐다보기만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누군가 나서서 나를 감쌌고 다른 누군가는 한을 막아섰다. 나는 부어오른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았고 한은 나를 노려보며 핏대를 세우고 욕을 했다. 그날 한은 왜 그렇게나 화를 냈는지, 나는 왜 미안하다고 했는지, 왜 맞고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지나 화장실 칸 문을 걸어 잠그고 엉엉 울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야구를 못 본다. 나는 맞고 사는 건 싫었다. 나는 엄마나 할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때렸던 할아버지나, 보고 배워 똑같이 때린 아빠나. 때린 놈이 잘못한 거지. 할머니는 당신 나름 최선의 선택을 했던 것이었고, 엄마도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내가 없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지금 내가 도망쳐 나온 것처럼 내가 없을 때 도망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바보라고, 나를 왜 기어코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느냐고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