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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청혼

by 제제 Dec 04. 2024

아빠에게 맞고 살다가 집을 뛰쳐나온 스무 살의 나는 가장 먼 타지로 향했다. 열아홉 생일이 지나자마자

300에 25만 원짜리 월세방을 구했고, 택배로 짐을 부쳐놓고 살았던 작은 그곳에서 작게 살았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장의사가 시체를 닦아 삶을 지우고 특수청소 업체가 고독사 한 사람의 집을 치우듯 나는 그렇게 잊혀지고 싶었다. 그러던 중에도 나는 살았다. 그래서 돈을 벌어야만 했다.


일주일 동안 열리는 행사장의 단기 아르바이트, 흰 티셔츠와 검은색 바지를 맞춰 입어야 했다. 거기에 너랑 내가 있었지. 담배에 불을 붙일 라이터가 없었고 나는 너무 일찍 도착했다. 왜인지 너도 되게 일찍 도착해 있었어. 흰색 반팔에 검정 슬랙스를 입은 네가 먼저 담배를 피우던 골목이었고, 나는 너한테 가서 불을 빌리고, 나란히 쪼그려 앉은 우리는 시간을 태우고. 일 할 시간이 됐다. 모나미 볼펜 같았던 무리가 소란스럽게 행사장을 꾸려서 일을 시작했다. 키가 크고 힘이 좋던 너는 궂은일을 도맡았고, 볼 멘 소리도 없이 묵묵했다. 쉬는 시간엔 담배 한 까치를 꺼내 만지작 거리는 나한테 와서 불을 붙여줬다.


일주일 중에 며칠이 지났다. 한데 모여서 열심히 꾸민 행사장이 참 예뻤다. 나도 그 예쁜 것을 같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이걸 간직하고 싶었다. 중고로 샀던 오래된 아이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찍으면서 예쁘다, 예쁘다 했다. 그 모습이 내 얼굴을 찍는 것처럼 보였던 건지 나한테 짓궂게 장난치는 네 말에 나는 울었다. 울면서 집으로 갔다. 내일은 출근을 못 한다고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지하철 개찰구를 지났다. 나는 조용히 일 하고 돈만 받으면 그만이었는데 눈물까지 흘린 건 실수였다. 한 사람이지만 누군가의 기억에 남는 건 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다음 날 출근하는 나는 현관에 놓인 라이터를 보고도 챙기지 않았다. 오늘도 네가 제일 먼저 왔네- 인사를 라이터 빌려달라는 말로 대신했다. 그 골목에는 담배연기가 꼈고 그 연기에는 어제 울려서 미안하다는 너의 한숨과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니라는 나의 대답이 한 데 섞여있었다. 너랑 나는 말없이 대화를 했다. 행사장이 열렸던 일주일은 짧았고 우리의 1년은 더 짧았다. 우리는 자주 말없이 사랑했다. 네 눈과 네 손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보고 만질 수 있는 사랑이었다.


네 부모님 차를 타고 철원까지 너를 보러 갔다. 고무신을 신었다는 말이 퍽 마음에 들었다. 인터넷편지도 손편지도 영상편지도 마음을 담아서 써 내려갔다. 그러다가 우리는 헤어졌다. 어느 날엔가 발이 불편해서 아래를 내려다봤고, 고무신이 거꾸로 신겨져 있던 꿈을 꿨다. 벗으려고 해도 벗겨지지도 않았고 낑낑 안간힘을 써서 겨우 벗은 고무신은 앞 뒤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고쳐 신어도 거꾸로 신어지는 불쾌한 꿈이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네가 쓴 아이폰 속 일기장에는 내 이야기뿐이었다. 너의 일기가 바로 고백이었다. 좋아하는 애를 울렸네, 병신. 사실 병신은 네가 아니라 나였다고 얘기하고 널 보냈어야 했어. 네가 함께했던 나의 스무 살은 빛이 났던 것 같은데, 네가 나를 밝히느라 너는 어두웠던 것 같아. 너의 19살 기억을 꺼내 고백하던 말이 기억난다. 늦은 밤까지 공부를 하다가 거실로 나왔을 때 부모님의 신음소리를 들었다고, 너도 나랑 결혼해서 그 나이가 되어서도 하고 싶다고, 그 나이가 돼도 나는 예쁠 것 같다고. 나를 울렸던 날 너의 이야기도 들었다. 열심히 눈을 반짝거리면서 사진을 찍는 나를 봤는데, 그게 참 예뻐 보였는데, 내 입에서 예쁘다는 말이 나왔을 때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 들어서, 내가 내가 예쁜 걸 아는 게 얄미워서, 불 빌려달라는 말 말고는 처음 듣는 말이라서. 그래서 그랬어 고백하는 네 얘기를 듣고 또 울었다. 나를 예쁘다고 1년을 꼬박 매일 말해주는 네가 좋았다. 나는 내가 예쁜 줄 모르고 살았는데 너는 자꾸만 예쁘다고 했다. 그래서 그 말을 계속 듣고 싶었다.


스무 살의 내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청혼이었다. 지갑 없이도 만나 웃을 수 있었던,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어린 너와 내가 꿈꾸던 결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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