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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그리고 돌아보기

색연필

by 상경논총

백지 1장에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의 인생을 그려보라고 하면, 백지를 얼마나 채울 수 있을까? 어떤 사건들을 가장 크게 그릴 것인가? 어떤 사건을 중앙에, 그리고 어떤 사건을 가장자리에 그릴 것인가? 어떤 사건을 흑백으로만 둘 것이며, 어떤 사건에 색을 칠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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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필자 촬영 (화가: Aleisha Nelson)


작년 가을에 한 학기 동안 교환학생으로 파견되었는데, 학기 종강을 앞두고 구경하러 간 예술인 마켓에서 파견되었던 학교의 캠퍼스와 주변 지역을 약도처럼 그려 프린터로 인쇄한, A4용지보다 조금 작은 종이를 팔았다. 백지에 검은색으로 네모난 건물들과 도로, 근처에 흐르던 강과 다리의 위치가 그려진 아주 단순한 그림이었다. 평소 그림에 관심이 없었지만, 교환학생 생활의 추억을 간직하고자 홀린 듯이 구매했다.


크기가 작아 건물명이 적히지 않은 건물들은 모양으로 어떤 건물인지 유추해내야 했다. 무슨 건물인지 기억해내기 위해 약도를 자세하게 보다 보니, 해당 장소에서 있었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생각났다. 처음에는 수업을 듣는 건물을 찾아갈 때도 지도 앱을 보면서 찾아가야 했는데, 이제는 건물의 모양만 보고도 어떤 건물인지 아는 것이 신기했다.


흑백 그림이 뭔가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귀국한 후, 색연필로 특히 의미가 더욱 깊었던 장소들을 색연필로 색칠하기 시작했다. 첫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모였던 체육관, 친구들과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포켓볼을 쳤던 기숙사, 사진 수업을 수강하며 밤새도록 포토샵 과제를 했던 예술 전공 건물, 친구와 세미나실을 빌려 공포 영화를 봤던 도서관, 신나게 스케이트를 탔던 교내 아이스링크, 신기할 정도로 입맛이 비슷했던 친구와 자주 갔던 쿠키 가게… 캠퍼스에서 예쁘기로 유명한 장소들이 많았지만, 오히려 그런 장소들보다 친구들과의 사소한 일상이자 추억이 담긴 장소들에 알록달록한 색을 칠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차차 희미해지는 기억들이 많겠지만, 이런 추억들은 희미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약도를 통해 교환학생 생활의 추억을 돌아볼 수 있었던 것처럼,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백지에 그리고, 인생을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시점에서 그림을 그리면, 중앙에, 가장 크게 그릴 사건은 새내기 때의 송도 생활, 신촌 생활, 교환학생 생활을 비롯한 대학교 생활이다. 송도 캠퍼스를 떠올리면 푸릇푸릇했던 기억이 떠오르는 만큼 초록색으로 물들이고, 송도 캠퍼스에서의 마지막 날 밤, 룸메이트와 언더우드기념도서관 뒤편 공터에서 연세 돕바를 침낭 삼아 냅다 맨바닥에 드러누워 구경했던 별들,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봤던 별똥별도 노랗게 그리고 싶다.


아카라카가 열리는 노천극장은 파란색으로 칠하고, 아카라카만큼 흥미진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정들었던 강의실도 한두 개 그릴 것이다 (물론 강의실은 그냥 흑백으로 놔둬도 좋을 것 같다). 교환학생 생활은 워낙 새롭고 의미 있는 경험을 많이 해서 어떤 경험을 그림으로 그려낼지도 고민이다. 하나 확실한 건, 매일 그림 같은 풍경을 볼 수 있었던 기숙사 방 창문을 그릴 것이다. 방문을 열자마자 창문이 보이는 구조였는데, 기숙사 건너편은 숲이어서 여름에는 청량한 하늘과 푸릇푸릇한 나무들, 가을에는 붉은 단풍, 그리고 겨울에는 보기만 해도 추워지는 앙상한 숲을 볼 수 있었다. 창문틀이 마치 변하는 계절을 담아내는 액자 같았다.


인생을 그리는 시점이 10살, 20살, 30살, 뒤로 갈수록 중앙에, 가장 크게 그렸던 사건들은 점점 그 크기가 작아지고 가장자리로 밀려날 텐데, 벌써 아쉽다. 그래도 지금은 백지 군데군데가 비어있을 테지만, 앞으로 크고 작은 경험으로 공간을 채워나갈 생각에 설렌다. 꼭 거창한 경험이 아니더라도, 회상했을 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알록달록한 경험들로 백지를 채워나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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