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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0과 무한 사이에서 그려지는 기억

Dynamis

by 상경논총

우리의 말 속에서 ‘그리다’는 참 많이 등장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 미래를 ‘그리며’ 잠재력을 찾는 것, 기억을 ‘그리는’ 것까지. 여러분에게 ‘그리다’는 어떤 의미로 가장 먼저 다가오나요?


오늘 저는 여러분께 기억을 ‘그리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이라는 여정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억들을 가지게 됩니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분 나쁜 기억들도 있을 테고, 무슨 일이 있다어도 이 기억만은 잊지 않고 간직하고 싶은 행복한 기억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은 우리의 기억을 역설적으로 만들어두었습니다. 어쩌면 태초의 인간이 신과 거래한 대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한 일들을 기억으로 남기게 해주는 대신, 잊고 싶은 일들마저도 잊지 못하게 만들어두었습니다. 기억의 본질적 속성인가 봅니다.


저는 종종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들은 잊히기 마련이라는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기억은 그 특성상 잊히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시간이 지나 ‘희미해질’ 뿐인 것이죠.


수학적으로 ‘기억’에 대해 잠시 표현해볼까 하는데요. 함수의 극한에서 함수는 0에 무한히 수렴하지만, 결코 0은 되지 못합니다. 저는 기억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시간이 지나다 보면 기억이 우리가 ‘잊었다’라고 표현하는 0의 상태에 더 가까이 수렴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잊지는’ 못하는 것이죠. 우리 뇌의 기억저장공간에서 그 기억이 차지하는 자리가 작아질 뿐, 분명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아주 작게 존재하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잊고 싶은 기억들을 잊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 대신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을 우리만의 저장공간 속에 평생 담아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등가교환이 되었으려나요.


있는 듯 없는 듯 조각으로 존재하던 기억들을 꺼내고 싶을 때, 우리는 조심스럽게 그 기억들을 되살리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고 저는 이 과정을 기억을 ‘그리다’라고 정의 내리고 싶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은 어느 날, 0과 무한 사이 어딘가에서 떠다니고 있는 여러분만의 기억들을 그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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