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부원 구나윤
0. 들어가며
서학개미는 여전히 ‘개미’일까?
최근 몇 년간 언론과 금융 관련 기사에서 ‘개미’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서학개미’, ‘동학개미’, 심지어 ‘중학개미’까지, 다양한 수식어가 붙은 ‘개미’들이 투자 시장의 새로운 주체로 떠오르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개미’들은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일까?
‘개미’는 무엇일까? 금융시장에는 다양한 주체가 존재한다. 대규모 자본을 운용하며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기관투자자가 있는가 하면, 부수적인 수익 창출을 위해 비교적 소규모 자금을 투자하는 개인투자자도 있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적은 자금을 투입하며 조용히 주식을 사들이는 개인들의 모습을, 마치 작은 곡식을 차곡차곡 옮기는 개미와 비슷하다 하여 ‘개미 투자자’라 부르게 된 것이다. 또한, 기관에 비해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미미하다는 점도 ‘개미’라는 별명을 붙이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금융시장의 흐름은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여러 개인투자자들의 움직임이 같은 방향으로 집중되면서, 이제는 그들의 움직임이 시장에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2020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한 서양 주식 그 중 특히 미국 주식에의 투자를 주로하는 ‘서학개미’가 있다.
서학개미 그리고 해외 투자 확대의 시작
‘서학개미’라는 말이 말해주듯, 우리에게 해외 투자는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며, 해외 주식에 투자하고 있는 개인투자자들을 찾아보기 쉬워졌다. 개인투자자들도 기관투자자들 만큼이나 해외 투자를 활발히 하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개인투자자의 해외 투자는 언제부터 본격화된 것일까? 그 시작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4년, 일반투자자의 외화증권 직접투자가 최초로 허용되면서, 국내 일반 투자자들도 자유롭게 해외 자산에 투자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06년 즈음에는 개인투자자의 해외주식 직접투자에 대한 제한이 대부분 폐지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국장에 몰리던 관심은 점차 미국이나 유럽 등 주요 해외시장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2015년, 기획재정부는 ‘해외투자 활성화 방안’을 발표하며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와 해외주식투자 전용펀드 등의 세제혜택을 도입했고, 이는 해외투자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제도적 변화는 국내 개인투자자들의 해외투자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제도적 변화가 선행된 상황에서 해외투자의 접근성 향상이나 개인투자자의 투자 성향 변화 등의 요인이 개입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국내 개인투자자들의 자금이 해외로 빠르게 이탈하기 시작한 것은 국내 경제적 상황에 기인한다. 이후 살펴볼 2020년 코로나 펜데믹이 티핑포인트로 작용하면서 국내 개인투자자들의 해외 투자가 급증하며 해외증권상품이 그들의 주 투자종목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은 기존 투자자들의 홈 바이어스(home bias)가 완화된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 투자자들의 과도한 국내시장 이탈은 국내 경제의 문제를 부각하기도 했다. 그런만큼 2020년 전후로 발생한 국내 투자시장의 변화도 눈여겨볼만하다.
‘서학개미’를 더 이상 ‘개미’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그 영향력이 커지게 된 구체적 배경은 무엇일까? 또한 과도하게 해외시장으로 자금이 이동하는 흐름이 결국 국내 경제의 문제에서 기인한다면, 국내 시장에 머물게 하려는 노력은 과연 존재하지 않았을까? 본 글에서는 기존에 국내 증권시장에 투자하던 개인 투자자들이 왜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는지를 분석하고, 정부와 관련 기관의 정책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흐름을 막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1. 국내 증시가 개인투자자의 해외투자 확대에 미친 영향
해외로 이탈하는 개인투자자… 그 원인은 어디에?
앞서 언급했듯, 개인투자자들의 해외투자 증가 추세의 변곡점에는 코로나 펜데믹이 있다. 2020년 이후 개인투자자의 해외주식투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개인투자자 해외주식 보유잔액은 2023년까지 ‘연평균 42%증가’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최근 들어 급증하고 있는 해외투자 수요는 과거에 비해 크게 확대된 해외투자 접근성과 개인투자자들의 고수익 추구 성향으로 일정 부분 설명되며, 이러한 변화를 조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 주목해야할 점은 코로나 펜데믹을 계기로 자극된 해외투자 수요의 큰 부분이 국내 경제적 상황에 영향을 받은 만큼, 국내 경제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단순히 ‘무엇이 개인투자자들의 해외투자를 증진시켰는가’가 아니라 ‘왜 개인투자자들이 해외로 이탈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 개인투자자들의 해외투자 수요 증가는 국내 경제의 취약성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과거에 비해 크게 확대된 해외투자에의 접근성과 개인투자자들의 고수익 추구 성향 또한 이 흐름을 가속화시킨 배경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요인을 우선적으로 들여다보자.
해외주식투자 전용펀드의 비과세 혜택이 종료되면서 직접투자가 급증한 것은 이 혜택이 해외투자에의 접근성을 높이는데에 성공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2017년까지 한시 가입을 받은 해외주식투자 전용펀드는 개인투자자들이 해외투자를 적극적으로 하도록 했고, 이후 가입기간이 종료되자 많은 투자자들이 해외투자를 위해 직접투자를 고려하도록 하여 궁극적으로 접근성을 제고했다. 낮은 수수료 또한 해외투자 접근성을 향상시켰다. 한국은 다른 주요국에 비해 해외주식 직접거래 시 발생하는 수수료가 낮게 형성되는데, 이는 해외 주식의 예탁과 보관이 개별 증권사가 아니라 중앙화된 기관인 한국예탁결제원을 통해 일괄적으로 관리되는 집중예탁구조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규모의 경제를 실현시켜 가능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해외투자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하면서 국내 증권사들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생겨난 수수료 인하 경쟁도 배제할 수 없다. 해외 자산에 투자하는 국내상장 해외 ETF의 확대도 해외투자 접근성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기존 펀드와 달리 국내상장 해외 ETF는 환전이나 거래시간의 제한없이 투자가 가능했고, 이 점이 개인투자자들의 투자 심리를 자극하여 해외투자의 확대로 이어지도록 했다.
접근성 향상과 더불어 개인투자자들의 투자성향의 변화도 그들의 자금이 해외시장으로 향하도록 했다. 국내상장 해외 ETF의 확대와 맞물려 나타난 개인투자자들의 고수익 추구성향의 강화로 기존 펀드나 ETF보다 수익성을 크게 창출할 수 있는 파생상품 ETF에의 투자도 확대되었다. 개인투자자들이 이전보다 고수익을 선호하게 된 것은 코로나19 시기와 연관이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세계적인 경제 둔화 속에서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들이 경제 부양을 위해 금리를 인하하면서 초저금리 기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장단기 시장금리의 하락에 따라 약화된 수익성에 대응하기 위해 개인투자자들의 수익률 추구성향이 강화되었고, 이를 충족하기 위해 고수익 상품을 찾게 된 것이다. 많은 개인투자자들이 고수익 추구를 위해 레버리지 ETF와 인버스 ETF와 같은 파생상품 ETF를 선택했다. 증가한 레버리지/인버스 ETF 투자 수요는 국내자산을 기반으로 하는 ETF 뿐 아니라 해외자산 기반 ETF에도 투자가 증가하게 하여 개인투자자들의 해외투자를 증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개인투자자들의 고수익 추구 성향은 일반 주식 투자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들이 더 높은 수익을 기대하며 진입한 것은 다름아닌 주식시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국내 주식시장이 아닌 미국 주식시장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코로나 19 이후 형성된 초저금리 기조로 인해 급증한 주식시장 수요는 왜 한국 주식시장이 아닌 미국 주식시장으로 향한 것일까? 과연 미국 주식시장은 국내 주식시장보다 수익성이 더 높다고 기대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기대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해외투자 유인이 되어버린 국내 경제의 취약성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앞서 강조했던 국내 경제의 취약성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가장 주목해야할 것은 국내 주식시장의 부진이다. 국내 증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장기간 박스권에 머물렀다. 2018년과 2021년에는 코스피지수가 각각 2,500선과 3,300선까지 상승하며 박스권 탈출 가능성을 보였지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에 그쳤다. 특히 2021년의 급등은 코로나19 이후 형성된 초저금리 기조에 따른 유동성 확대와 개인투자자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당시 주식시장의 상승장이 장기적으로 이어지지 못한 점은 국내 주식시장의 구조적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많은 국내 개인투자자들이 오랜기간 이어져온 국내 증시의 박스권 장기화와 더불어 삼성전자 등 소수 대형주 중심으로만 움직이던 국내 주식시장의 구조적 한계를 인식하고 해외 시장으로 이탈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한계에 대한 인식과 맞물려 미국의 테슬라나 엔비디아 등 AI를 기반으로 한 반도체 업종 및 기술주가 급등하면서 국내 주식시장 이탈이 더욱 가속화되기도 했다. 결국 국내 증시의 박스권이 유동성 확대와 초저금리로 증가한 개인투자자의 주식투자에 대한 수요가 한국 시장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막은 셈이다.
물론 개인투자자들의 해외투자 증가는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접근성의 향상, 고수익 추구 성향 등과 더불어 시기에 따라 환율 등의 요인도 그 흐름을 가속화시키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요인을 종합하더라도, 개인투자자들의 해외 유입은 결국 국내 시장의 '이탈'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 출발점은 국내 주식시장의 구조적 부진에 있다. 장기간 박스권에 갇힌 국내 증시와 대형주 중심의 제한된 수익 기회는 투자자들로 하여금 보다 역동적이고 성장 가능성이 큰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특히, 미국 주식시장으로의 집중은 단순한 투자 대안의 선택이 아니라, 국내 시장이 제공하지 못한 수익성과 기대감을 외부에서 찾으려는 적극적인 탈출의 결과였다. 결국 해외투자 수요의 증가는 단지 투자 다변화의 흐름이 아니라, 국내 주식시장이 오랜 기간 해결하지 못한 구조적 한계에 대한 집단적 반응이었던 셈이다.
2. 국내 밸류업 프로그램과 실효성
국내 증시 박스권 탈출 노력은 없었을까?
이쯤에서 드는 의문이 있을 것이다. ‘국내 주식시장의 구조적 한계를 인식하고 있다면,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있지 않았을까?’ 국내 증시의 박스권 장기화가 계속되는 것은 결국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상당 부분 설명된다. 한국 상장기업 주식의 가치평가 수준은 실제 기업의 경쟁력에 비해 저평가되어 오고 있어, 유사한 해외 상장기업 주식보다 낮은 밸류에이션을 보인다. 이렇게 낮게 형성되는 가치평가는 결국 해외 투자자들 뿐 아니라 국내 개인투자자들로 하여금 국내 주식의 매력을 낮게 판단하도록 하여 국내 주식에 투자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문제가 명확한 만큼, 국내에서도 가치평가를 높이기 위한 노력이 존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밸류업 프로그램이다. 2024년 정부는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가치를 제고할 수 있는 밸류업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기업 가치를 높이는 방법은 여러가지이지만, 당시 정부가 발표한 주요 내용은 기업의 자율적 밸류업 공시, 주주환원 정책 강화, 세제 지원 혜택, 지배구조 개선, 그리고 밸류업 지수 및 ETF 개발 등이었다. 기업가치 즉, 밸류에이션를 측정할 때 일반적으로 PER이나 PBR이 사용된다. PER과 PBR이 낮다는 것은 기업가치가 저평가되고 있음을 뜻한다. 한국 주식시장은 두 지표 모두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어, 정부는 밸류업 프로그램을 통해 기업의 수익성과 시장 신뢰를 높이고, 결과적으로 PBR과 같은 가치평가지표의 정상화를 유도하고자 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주주환원 정책 강화이다. 높은 주주환원율은 기업이 이익 중 많은 부분을 주주에게 환원해준다는 것을 의미하는 만큼 주주의 수익도 제고될 뿐 아니라, 이를 보고 투자하려는 투자수요가 커져 주가상승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상승한 주가는 자연스럽게 높은 PBR로 이어져 기업가치가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되도록 하는 선순환 구조를 형성한다. 하지만 한국은 타국에 비해 주주환원율이 낮다는 한계가 있다. 특히 미국과 비교했을 때 2013~2022년 10년간 평균 29%의 주주환원율을 기록한 한국에 비해 미국은 같은 기간 92%를 기록한만큼 그 차이가 상당하다. 이러한 배경에서 기업의 자사주 매입 및 소각은 주주환원을 실현하는 대표적인 수단으로 강조된다. 자사주를 매입하여 소각할 경우 시장에 유통된 주식 수가 줄어 주당순이익(EPS)이 증가하게 된다. 이는 기업의 이익 중 많은 부분이 주주들에게 집중된다는 것을 의미하여 주주환원율을 실질적으로 높이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배당금의 확대 또한 주주환원율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자사주 매입 및 소각과 함께 기업가치의 재평가를 이끄는 중요한 수단으로 꼽힌다.
이처럼 밸류업 프로그램은 주주환원 강화 정책 외에도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수립하여 공시하도록 유도하고, 기업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한 제도 개선, 주주환원에 적극적인 기업들에의 세제 혜택 인센티브 제공 등을 통해 참여를 장려하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만약 이 프로그램이 기대에 부흥한다면, 기업 가치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져 한국 주식시장의 고질병인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결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밸류업 프로그램, 정말 밸류에이션을 높였을까?
그런데 과연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결하는 것이 이렇게 단순한 문제일까? 간단했다면 왜 고질병으로 한국을 오래도록 괴롭힌 것일까? 밸류업 프로그램으로 국내 증시의 가치평가를 증진시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밸류업 프로그램이 효과적으로 작용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기업들이 밸류업 공시를 명확히 하고, 주주환원에 적극적이어야 프로그램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렇다면 2024년 도입된 한국의 밸류업 프로그램은 잘 시행되고 있을까? 놀라운 것은 정부의 밸류업 프로그램 도입 이후 PBR이 오히려 하락했다는 점이다. 정부의 발표 시점과 비교했을 때, 2024년 11월 한국거래소에 상장된 전체 기업 중 72%가 PBR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추세는 밸류업 프로그램에 의심을 낳게 할 수 밖에 없다. 과연 한국의 밸류업 프로그램은 실효성이 있을까?
밸류업 프로그램 발표에도 불구하고 가치평가가 개선되지 않은 것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기업들의 저조한 참여율에 있다. 2025년 4월 기준 코스피 상장기업 113개사, 코스닥 상장기업 30개사가 밸류업 계획 공시를 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코스피⋅코스닥 총 상장사 수를 고려했을 때 10%도 채 되지 않는 수이다. 이에 밸류업 프로그램이 처음 발표되면서 형성된 전반적인 밸류에이션 회복에 대한 기대가 좌절되면서 PBR이 하락하는 등의 밸류에이션 악화라는 역효과를 낳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밸류업 공시를 했을 때 기업이 얻게 될 이득은 비교적 분명하다. 단순히 투자 수요를 자극하는 것을 넘어 밸류업 공시 이후 공시 기업들에는 양(+)의 초과수익률이 나타날 뿐 아니라 비공시 기업과의 매출성장률의 차이가 확대되기도 한다. 그런데 왜 아직 많은 기업이 공시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어떤 기업이 공시를 했는가’이다. 코스피와 코스닥 상장사들의 공시 현황을 보면, 대기업과 중견기업이 주로 상장되는 코스피는 113개의 기업이 공시를 한 반면, 중소기업이 주로 상장되는 코스닥은 30개의 기업만이 공시를 했는데, 이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밸류업 공시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는 점을 암시한다. 앞서 언급했듯, 일반적으로 밸류업 계획은 주주환원 확대를 주로 하는데, 주주환원율 향상을 위해 활용되는 자사주 매입 및 소각이나 배당금 확대는 중소기업의 재무 부담을 증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현금흐름이 충분한 대기업에 비해 중소기업은 자사주 매입을 크게 늘릴 경우 부채를 증가시킬 가능성이 커져 기업의 부담을 증가시키고, 마찬가지로 자사주를 소각하면 자기자본이 줄어 부채비율이 올라가 신용도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부담이 생기게 된다.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의 경우 신뢰기반이 대기업에 비해 약하기 때문에 시장의 실망 리스크가 더욱 크게 작용한다. 기업이 밸류업 공시를 하면서 발표한 목표와 계획을 믿고 투자를 결정한 투자자들이 이후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실망을 했을 때 기업에 미칠 타격이 리스크로 작용하여 공시를 망설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대기업과는 재무 구조나 현금흐름이 다른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밸류업 공시를 결정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따라서 밸류업 프로그램을 단순히 공시와 주주환원 확대, 지배구조 개선만으로 높은 밸류에이션을 달성할 수 있는 방안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현재 밸류업이 필요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밸류업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정책적 강조는 오히려 목표가 달성되지 않을 경우 시장의 실망을 키워 한국 증시를 박스권에 가두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밸류업 프로그램의 타격은 어디까지?
밸류업 공시로 인한 역효과는 해당 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에는 주요 금융지주사들이 밸류업 공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금융지주는 자기자본을 위험가중자산(RWA)으로 나눈 자본비율(CET1)을 핵심지표로 삼아 주주 환원 규모를 산출한다. 때문에 위험자산 비중을 줄일수록 자본비율이 높아지고, 이는 더 많은 주주 환원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금융지주사들은 위험자산으로 간주되는 비우량 대출을 대폭 축소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신용등급이 낮은 중소기업들은 대출 금리와 승인 문턱이 높아지면서 돈줄이 마르기 시작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소기업들은 유동성 리스크에 더 크게 노출되고, 이는 단순히 개별 기업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부도 증가, 고용 축소, 투자 위축 등 실물 경제 전반에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처럼 밸류업 프로그램은 도입 취지와는 다르게 중소기업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대기업만 이득을 보게하는 구조로 작용할 수 있다. 즉,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 격차가 더 벌어지며 시장의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중소기업 없이 경제가 잘 운영될 수 있을까? 대답은 분명히 ‘아니다’일 것이다. 중소기업은 일자리 창출과 혁신의 핵심 동력으로, 경제의 다양성과 지속 가능한 성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밸류업 프로그램은 ‘공시’와 ‘유동성’ 측면에서 중소기업에게 구조적으로 부담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밸류업 프로그램과 더불어 국내 증시 전체적인 밸류에이션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수반되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3. 밸류업 프로그램과 병행되어야 할 중소기업 소외 없는 증시 활성화 과제
중소기업을 고려한 균형잡힌 상장폐지 제도 개선
이러한 현실은 결국 밸류업 프로그램만으로는 한국 증시의 구조적인 저평가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 특히, 기업의 자발적 참여에 의존하는 현행 방식은 대기업 중심의 효과 편중과 중소기업에 대한 부담이라는 부작용을 낳고 있어, 밸류에이션 제고를 위한 보다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밸류업 프로그램과 병행하여 한국 증시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제도적 대안으로 상장폐지 제도의 개편이 주목받고 있다.
해외시장에의 투자를 크게 늘린 국내 개인투자자들의 자금을 다시 국내시장으로 끌어오기 위해서는 국내시장에 대한 신뢰와 기대수익을 올림으로써 개인투자자들에게 해외시장에서 기대하던 바를 국내시장에서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상장시장 전반의 밸류에이션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며, 상장폐지 제도를 개선하여 상장기업의 건전성을 제고하는 것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3년 연속 이자보상배율이 1미만인 한계기업이 2023년 기준 약 18%에 달하며, 지속적인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재무 건전성이 약한 기업들이 상장시장에 남아있게 되어 전반적인 시장 건전성을 악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상장폐지 요건을 상향 조정하고 절차를 효율화하여 상장 적격성 저하 기업을 적시 퇴출하는 것이 국내 상장시장의 수익성을 제고할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함께 고려되어야 할 점은 중소기업이 한계기업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상장폐지 제도를 개선하는 것은 상장시장의 평균적 밸류에이션을 증진할 수는 있지만 중소기업의 상장을 폐지함으로써 밸류업 프로그램으로 겪고있는 유동성 리스크를 다시 직면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즉, 상장폐지 제도 개선은 중소기업의 구조상 어려움을 외면하고 대기업만 살아남자는 식의 논리가 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상장폐지를 이자보상배율 등의 단순 재무지표로 일괄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경영개선 가능성이 있는 기업은 유예 또는 조건부 유지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하는 등 중소기업의 유동성 리스크를 키우지 않도록 하는 병행 대책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즉, 제시된 ‘상장폐지 제도 개선을 통한 한계기업 적시 퇴출’은 한계기업을 상장시장에서 ‘퇴출’시켜버림으로써 상장시장 밸류에이션을 제고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한계기업이 건전성을 제고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전략으로 작용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밸류업을 위한 밸류업 프로그램의 제도적 보완
결국 중소기업이 시장에서 자생력을 갖추고 구조적 건전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면, 퇴출 위주의 소극적 정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앞서 언급했던 밸류업의 부정적 파급효과를 막기 위해서는 중소기업의 현실을 고려한 제도적 보완책을 병행하여 밸류업 프로그램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중소기업의 밸류업 공시로 발생하는 리스크보다 예상 기업 이익이 커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적합한 유인책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현재 발표된 밸류업 프로그램의 세제혜택의 경우 대기업과 중소기업에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비해 주주환원 금액이 낮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중소기업에 대한 법인세 과세특례 요건을 완화하여 차등적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다. 재무 구조상 대기업에 비해 밸류업에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중소기업의 특징을 고려하여 세제혜택을 제도적으로 개선할 경우, 중소기업에 밸류업 공시에 대한 인센티브를 더욱 강력하게 제공할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
또한, 밸류업 프로그램은 근본적인 기업 경쟁력을 제고한다기 보다 기업 주주가치를 향상시키는 재무적 조치에 가깝다는 정책상 특징에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문제를 보완하기 위한 추가적 조치가 필수적이다. 물론 많은 기업들이 실제 경쟁력에 비해 저평가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의 기술주가 급등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AI와 같은 기술적 측면에서 기업 경쟁력을 제고했을 때의 투자수요 증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밸류업 프로그램은 중소기업이 주주환원을 높이는 데에 많은 비중의 자금을 투입하게 하여 정작 기업 자체의 가치를 높이는 데에 투자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R&D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 R&D에의 기업 투자가 위축될 경우 기업의 장기적 성장을 통한 경쟁력 제고를 어렵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R&D 지원을 확대하거나 세제혜택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정부 차원에서 추가적인 지원을 한다면, 기업의 자금 투입이 과도하게 주주환원에만 집중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4.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쏠림의 역설: 편향이 만들어낸 개미의 영향력
최근 가속화된 국내 개인투자자들의 해외투자 확대는 한국 자본시장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개미’라 불리던 개인투자자들은 이제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내는 주요 주체로 자리매김했고, 그들이 향하는 방향은 자본의 흐름 자체를 바꿔놓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해졌다. 현재 그 방향은 ‘국내’가 아닌 ‘해외’를 향하고 있어 많은 자금이 이탈하고 있으며, 이는 단기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인 전환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정부는 국내 자본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새로운 접근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구조적 전환이 그대로 이어질 경우 국내 증시의 저조한 거래량은 기업들이 국내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만들어 결국 실물경제까지 그 부정적 영향을 퍼뜨릴 수 있다. 또한 과도한 해외투자 증가는 외환수급 부담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정부는 적극적으로 현재 형성된 해외투자 확대 기조를 멈추고 국내로 돌릴 필요가 있다. 아직 국가 차원에서 이를 위한 노력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된다. 단순한 밸류업 정책 도입을 넘어,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장기적인 기업가치 제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구조적인 인센티브를 꾸준히 제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특히 중소기업의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중소기업은 한국 경제의 ‘허리’를 지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거나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이기 쉽다. 밸류업 프로그램이 중소기업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으로 우려되는 상황에서 과도한 밸류업에 대한 강조는 중소기업이 겪는 어려움을 가중시킬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이는 시장의 왜곡을 심화하고 장기적으로는 국내 자본시장 전반의 신뢰를 저해할 수 있다. 따라서 중소기업이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밸류에이션을 높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야말로 국내 증시 체력을 강화하는 핵심이 되어야 하며, 이것이 바로 한국 경제에 주어진 과제이다.
동시에 주목해야 할 것은 현재 개인투자자들의 해외투자 확대는 전혀 투자 다변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되려 투자 대상의 변화로 설명된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투자자들에게 홈 바이어스가 약화되기는 했지만, 바이어스는 아직까지 존재한다. 개인투자자들의 해외투자 자산 배분이 AI 및 반도체 관련주 등의 특정 종목과 미국과 같은 특정 지역에 편향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개인투자자들이 타 투자자들의 투자대상이나 형성된 투자추세를 추종하면서 자리한 편향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기는 편향은 투자자들에게 분산 투자를 불가하게 하여 리스크를 키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FOMO, 과잉확신, 군집거래 등 심리적 요인으로 인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이와 같은 쏠림은 개인투자자들에게 위험 분산을 어렵게 만들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개인투자자들이 만들어내는 집단적 흐름이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들의 투자 성향 경계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그 관심과 자금 흐름이 국내로 돌아올 경우의 파급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투자자들이 신뢰할 수 있는 투자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투자자들의 에너지가 국내 시장으로 유입된다면, 이는 증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구조적 회복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과제는, 이제 ‘개미’가 아닌 주요 투자 주체가 된 이들이 국내 자본시장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한 시장 환경 조성이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일이다.
참고문헌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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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사
박재원, 정현주, 정의진, “금융 밸류업 힘주다가…中企 돈줄 막혔다”, 한경, 2025-04-08
서일원, 정민하, “밸류업 추진 1년 돼가는데… 상장사 72%는 오히려 PBR ‘뚝’”, 조선비즈, 2024-11-15
안중현, “주주 환원율 美 92%, 한국 29%… "배당 늘려야 한국 증시 밸류업"”, 조선경제, 2024-02-16
그림 및 도표
[그림1] 이재은, ‘서학개미 돌풍’에…작년 韓 해외투자 1조5197억달러 ‘사상 최대’, 조선비즈, 2021-06-23
[그림2] 김한수, 「개인투자자의 해외주식투자 특성 및 시사점」, 한국자본시장연구원, 2024
[그림3] 강소현, 「기업가치 제고와 자본시장 신회 강화 과제」, 자본시장연구원,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