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 울림 ; 여운(餘韻)

바람

by 상경논총

최근에 호스피스 병동이나 임종 직전의 이들을 수없이 만나며 곁을 지켰던 사람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사람들은 죽기 직전에 무엇을 후회하며, 무엇을 떠올릴까?

돈을 더 많이 벌어 둘 걸? 그때 그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커리어를 더 개발하며 살 걸?


아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뭐가 그렇게 미웠다고 그랬을까, 그때 더 용서할 걸. 가족이나 아내 혹은 남편에게 그때 더 사랑 한다고 말할 걸. 그때 더 용납해줄 걸.


이전부터 관심이 있는 주제가 있다면 기억과 망각의 갈등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어떤 순간에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억 혹은 망각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어떤 이들은 기억한다. 어떤 이들은 망각한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망각 하지만, 기억 하려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오아시스를 쓰기 전에 ‘여운’이라는 단어의 정의에 대해서 perplexity에게 물어 보았다.


나 : “여운”의 정의는 무엇이야?

perplexity : 여운의 정의는 일이 끝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느낌이나 정취, 또는 감정의 잔재를 뜻해요. 특히 예술, 문학, 혹은 감동적인 경험 이후에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감정이나 인상을 의미합니다.


결국 남아있는 울림을 뜻하는 여운(餘韻)도 기억과 망각의 갈등에서 기억의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관념이다. 나에게도 수많은 기억들이 있고, 그 기억들이 25살의 나를 구성할 뿐만 아니라 지탱하고 있다. 어떤 기억들은 명징하게 빛나기에 그 시금석 같던 시간들만 나의 영혼에 저장해 두고 싶지만, 지난하게 추악한 기억들조차 나의 구성요소임을 이제서야 전인격적으로 깨닫곤 한다. 남아있는 울림 중에 밝은 조각별들은 크게 마음에 걸리지 않는다. 다만, 이내 왜곡된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 안에서 서로에게 가시를 세우며 찌른 시간들에 대한 해답을 아직 명확히 찾지는 못했다. 그래도 포기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아주 긴 시간이 흐르더라도 내가 망각이 아닌 기억을 선택한다면 관계에 대한 구원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모든 삶이 끝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황석영 작가의 ‘손님’을 읽다가 보면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우리 오마닌 저 어려서부터 가끔씩 기도럴 하셌시오.”

“어떤 기도를……?”

“저를 낳자마자 아부진 손에 피를 묻혔다구 죄를 사해야 한다구요.”

“피를 묻혔지만……”


류요섭 목사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덧붙였다.


“구원받지 못할 영혼은 없는거다.”

(손님 ; 5장 맑은 혼 中, p.143, 황석영 저)


1,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은 나치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대학살 및 인체실험, 전쟁범죄와 같은 자신들의 과오를 망각하지 않았고, 철저히 자성함과 동시에 겸손히 노력하여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어 낸 뒤 현재는 유럽 열강들 사이에서 영국, 프랑스와 함께 세계를 이끄는 선진국 중 하나로 도약하였다. 신약성서 로마서에도 죄악이 더한 곳에 은혜가 가득한 말씀이 있는 것처럼, 나 또한 내가 가지고 있는 죄악된 울림을 잊지 않는다면 감히 희망을 역설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 죄악을 미친 사람들에게까지도 망각하지 않고 사랑의 기억을 선택한다면 말이다.


삶을 마치기 직전에 내 안에는 어떤 울림이 남아 있을 것이며, 어떤 언어로 지나온 시간들을 고백할 것인가? 후회 없이 사랑했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 문을 열었을 때 너무 일찍 하늘나라로 가버린 나의 동생 D를 하염없이 가슴에 품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D에 대한 기억만큼은 내 숨이 멎는 순간까지 가장 깊은 상흔이자 울림으로 남아있을 것이기에 말이다. 어느 여운보다 진한 여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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