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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90호 시작 19화

[오아시스] 시작과 끝, 그 사이

우물 밖 개구리

by 상경논총

“시간 많다고 여유 부리면서 미루지 말고 생각났을 때 할걸…”


글 제출 마감 전날, 나는 밤이 되고 나서야 미뤄두었던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번 호의 주제는 ‘시작’이네… 시작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이것저것 적어본다. ‘설렘’, ‘도전’, ‘두려움’, ‘끝’… 겨우 몇 자 끄적거리고, 아직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인 현실을 회피하려 다른 길로 새기 시작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간이 어느새 훌쩍 지났다. 이러다 언제 시작하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나는 집중력이 안 좋나 보다.


다시 원래 경로로 돌아와 현실을 마주해본다. 아직 갈 길이 멀었군. 부랴부랴 글을 써보려 하지만, 잘 써질 리가 있겠는가. 금방 해결될 거였으면 미리 썼겠지. 그렇다고 글을 잘 쓰고 싶은 욕심은 있어서 아무 글이나 쓰기는 또 싫다. 나는 왜 이제서야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나는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이번 학기는 유난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느낌이다. 분명히 개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달력을 보니 어느새 올해도 두 달이 채 남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른 학기와 달리 유난히 다사다난한 학기였던 것 같다. 어제와 오늘이 똑같았던 날이 단 하루도 없었을 정도로. 그렇기에 기존에 느꼈었던 시간이 빠르게 간다는 느낌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이전에는 루틴한 일상을 살아갔기에, 되돌아보면 기억나는 일들이 그렇게 다양하지 않아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 것 같다. 매일매일 쳇바퀴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잠깐잠깐 쳇바퀴를 탈출하다 보니 머릿속에 남은 기억은 그렇게 많지 않아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이번에는 너무나도 다채로운 경험을 하며 살아왔다. 삶의 여유를 느끼고자 강의 수강 대신 한강에 가기도 하고, 익숙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여기저기 놀러 가기도 하고, 우물에서 벗어나 돌아다니니 수많은 사람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이전의 나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을 하나둘 시작해 보았다. 이렇게 하루하루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내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어쩌면 이번에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 게 아니라,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어서, 되돌아본 기억이 없어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사실 새로운 시작을 그렇게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 현재도 만족스러운데 굳이 또 다른 시작을 해야 할까. 무언가 새롭게 시작하는 건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많아서 너무나도 귀찮은 일이고 준비한다고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닌데. 시작하지 않으면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위험을 굳이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현실에 만족해서 시작하지 않은 게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 귀찮아서, 좋지 않은 결과를 마주할 수 있다는 위험이 두려워서 시작하지 못한 게 아닐까.


그렇지만, 다양한 시작을 해보니 시작은 위험을 감수할 만큼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시작이 없으면 끝도 없기에, 과정과 결과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시작이 있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도전해서 결국 실패하면 어떤가. 실패도 하나의 결과일 뿐, 시작과 끝 그 사이에는 수많은 과정이 존재하고, 그 과정은 결과와 무관하게 나에게 어떻게 다가올지는 이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나는 시작과 끝 사이에 있는 과정은 간과한 채, 결과만 생각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이렇게 되돌아보니 이번 학기에는 기존에는 알지 못했던, 책으로는 배울 수 없었던 다양한 일들을 경험하고 있었네. 이제서야 글을 쓰고 있는 이유가 있었구나. 어쩌면, 이제야 글을 쓰기 시작해서 기존과는 다른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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