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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미 Aug 24. 2024

내가 썩소를 짓는 이유

내 상처에 소금 뿌리기#01

나는 웃을 때 썩소를 짓는다. 내 얼굴이 짝짝이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구안와사, 즉 안면 마비가 있다. 왼쪽 얼굴의 신경이 마비되어서 왼쪽 눈꺼풀과 왼쪽 입꼬리를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아무리 힘을 줘도 완전히 감기지 않는 내 왼쪽 눈은 잘 때 보면 살짝 흰자가 보인다. 아무리 용을 써도 위로 올라가지 않는 내 왼쪽 입꼬리는 사람들의 오해를 산다. 진심으로 좋아서 웃는 건데도 오른쪽 입꼬리는 3시, 왼쪽 입꼬리는 7시를 가리키니 억지로 웃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고등학생 때 내가 좋아하고 따랐던 과학 선생님과 복도에서 대화하던 중에 뜬금없이 “너는 왜 맨날 썩소 지어?”라고 말하던 선생님 얼굴이.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고등학생 때 이렇게 됐다. 아침에 학교 갈 준비를 하던 나는 오른쪽 눈으로는 윙크가 되는데 왼쪽 눈으로는 안 된다는 걸 발견하고 엄마한테 왼쪽 눈으로 윙크가 안 된다고 얘기했다. 엄마는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괜찮다고 말하며 넘어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왼쪽 얼굴이 점점 불편해지는 게 느껴져서 동네 한의원에 갔더니 ‘안면 마비’라고 했다. 안면 ‘마비’라니, 정말 무서운 단어였다. 한의원에서 신경외과를 가보라기에 유명한 병원을 찾아가 봤지만 너무 늦었다고 했다. 이미 죽어버린 신경을 되살릴 방법은 없다고.


여기저기 수소문해보니 대구 시내의 어느 한의원에 가면 발병한 지 오래된 구안와사도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서 진료를 받으러 다녔다. 매주 수요일마다 야자도 빼고 혼자 직행버스 타고 한 시간 거리의 한의원에 갔다. 가서 침도 맞고 한약도 지어와서 하루 세 번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반 년 정도 다녔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주 초기에는 차도가 조금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왼쪽 눈을 아주 조금이나마 더 감을 수 있었다. 뾰족한 침으로 신경을 자극하니 죽어있던 애가 조금 꿈틀대긴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아무리 왼쪽 얼굴과 정수리에 기다란 침을 수십 개 꽂아도, 찌릿찌릿한 전기 치료를 해도, 따뜻한 찜질과 적외선 치료를 해도 죽어버린 내 왼쪽 얼굴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고3이 되면서 대입으로 잠시 멈췄던 치료는 대학교 입학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면서 재개됐다. 그래도 서울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도시이니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집 근처 어느 한의원이 구안와사 치료를 잘한다고 하여 몇 달 동안 다녔는데, 그때부터 베개를 안 베고 자기 시작했다. 한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베개를 베고 자면 척추보다 머리가 더 높은 곳에 있어서 신경 순환이 잘 안 되니 베개 없이 머리를 맨바닥에 두고 자야 한다고 하셨다. 그날 밤 집에 돌아가서 곧장 베개를 치워버렸다. 처음에는 정말 이상하고 어색하고 불편했다. 20년 동안 폭신한 베개를 베고 자다가 갑자기 딱딱한 바닥을 느끼면서 자려니 오히려 신경이 더 굳는 것 같았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면서 불편해도 억지로라도 자는 연습을 했다. 지금까지 10년 넘게 남들 집에 다 있는 생필품 하나 줄인 채 살고 있지만, 결국 그 한의원에서도 내 얼굴은 치료되지 않았다.


그 다음 해에 진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경희대 한방병원에 갔다. 과 동기가 아는 사람이 몇 년 묵은 구안와사를 그 병원에서 싹 나았다고 알려줬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치료받은 교수님의 성함까지 알아봐 준 덕분에 생애 처음으로 대학병원이라는 곳에 다니기 시작했다. 한의학으로 유명한 경희대라서 그런지 확실히 이전에 다녔던 한의원보다 집중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교수님께서도 좋아지기 어려울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하는 데까지 해보자며 늘 정성스럽게 침을 놓아주시고 신경 회복에 좋은 얼굴 마사지도 꼼꼼히 알려주셨다. 일주일에 두 번 갈 때마다 4만 원이라는 병원비가 들고 수십 만원짜리 한약을 지어먹느라 힘들게 고추 농사 지은 돈을 보내주는 엄마에게 미안했지만, 그런만큼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라며 부지런히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그게 정말 마지막 치료가 되었다. 아무리 우리나라 한의학 분야의 최고라는 경희대 한방병원도, 오래된 구안와사라도 낫게 해준다는 교수님도 내 왼쪽 얼굴 신경을 부활시켜주진 못했다.     




처음에는 엄마가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왼쪽 눈으로 윙크가 안 된다고 말했을 때 바로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갔었으면 나았을 텐데, 엄마는 딸이 이상하다고 하는 데도 왜 괜찮다며 넘겼을까. 병원 하나 없는 시골에 살아서 그랬던 걸까, 당장 내일 먹을 쌀 사먹을 돈도 없어서 그랬던 걸까, 엄마는 왜 말로만 이쁘다, 이쁘다 하고 딸의 아프다는 말은 무시했을까. 너무나도 궁금했지만 차마 엄마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 엄마도 내 짝짝이 얼굴을 보며 늘 미안해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후 오랜 시간이 지나 그때 바로 병원에 갔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구안와사가 생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의 안면 마비는 대상포진의 후유증으로 왔다(고 짐작하고 있다). 마비 증상이 나타나기 불과 얼마 전에 온 얼굴과 몸이 붉은 물집들로 뒤덮였던 적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아토피가 심했던 탓에 아토피가 재발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피부과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얼굴 안의 신경들이 내 피부를 안으로 잡아당기는 끔찍한 고통 때문에 매일 괴로워하면서도 그게 대상포진이라는 걸 몰랐다. 병원에서도 피부병이라고만 했다. 그 고통이 신경 세포가 죽어가면서 지르는 비명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제대로 된 신경 치료를 받지 못했으니 엄마에게 윙크가 안 된다고 말했을 때 바로 병원에 갔었더라도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다. 그 역시 신경외과 대신 피부과를 데려간 엄마 잘못인가 싶다가도 그 당시에는 대상포진이라는 게 지금처럼 널리 알려진 병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잘못한 건 대상포진이지 엄마에겐 아무런 죄가 없다. 매일 밤 온 얼굴이 타는 듯한 뜨거움과 간지러움 때문에 잠 못 드는 나를 보며 누구보다 아팠을 사람은 엄마였을 테니까.     




지금은 이 짝짝이 얼굴을 고치겠다는 마음을 완전히 포기했다. 더 이상 죽은 애가 살아돌아오는 기적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걸 한다. 여전히 베개 없이 자고, 입을 크게 벌려 아에이오우 연습을 하고, 웃을 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고, 사진 찍을 때도 컵으로든 손으로든 필사적으로 왼쪽 입을 가리고, 왼쪽 볼살이 처지는 걸 막기 위해 기를 쓰고 살찌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여기에서 얼굴에 살이 조금이라도 더 붙으면 비대칭 얼굴이 더 심해진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대만에서 워홀을 지내는 동안 내 얼굴을 셀카로 남기는 것에는 조금 익숙해지긴 했다. 짝눈이든 뭐든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를 사진으로 기록해 두고 싶었다. 행복하고 가슴 벅찬 순간의 나를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었다. 물론 최대한 왼쪽 얼굴을 뒤로 빼고 사진을 찍긴 했지만, 그래도 내 사진을 찍는 것에 대한 공포는 사라졌다. 적어도 셀카에 한해서는.


그리고 한 가지 더. 내 불균형한 짝짝이 얼굴을 나라도 이쁘게 봐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여전히 대화할 때 상대가 나를 쳐다보면 내 얼굴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혼자 거울 앞에서 양쪽 입꼬리를 최대한 끌어올리며 말해본다. 짝짝이라도 괜찮다, 삐뚠 얼굴이지만 울상보다 웃상이 이쁘다고. 


그래도 다음 생에는 미소가 아름다운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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