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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미 Aug 24. 2024

영등포구청 '부타덴'에서 혼밥한 이야기

일상 관찰자의 사적인 편지#02

오늘 저녁에는 혼자 외식을 했어요. 오후에 영등포 청년센터라는 곳에 와서 브런치 글을 하나 썼는데, 평소 같으면 바로 집에 갔을테지만 센터 서가에서 왠지 오늘 꼭 읽어야 할 것 같은 책을 발견했거든요. 그런데 또 배가 고프긴 해서 일단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어요. 


뭘 먹을까 하고 네이버 지도를 보니 근처에 저장해뒀던 '부타덴'이라는 곳이 있었어요. 일본식 돼지고기 덮밥인 '부타동'을 파는 가게인데, 평점이 높아서 가보고 싶었던 집이었어요. 다시 돌아올 거긴 하지만 자리를 맡아두고 가는 것도 그러니 짐을 다 챙겨서 나섰어요.


가게 입구에는 '부타덴'이라고 적힌 하얀 천이 펄럭이고 있었고 오른편에는 '酒'라고 적힌 하얀 등이 걸려있었어요. 외관부터 일본 감성이 느껴졌어요. 슬쩍 안을 보니 손님들이 계시길래 안심하고 가게로 들어갔어요. 사실 네이버 지도에 최신 리뷰가 없어서 살짝 걱정했었거든요.


가게에 들어가니 정면에 고기 굽는 곳이 있고 그 주위를 ㄱ자로 다찌석이 둘러싸고 있었어요. 그야말로 초 오픈 주방이죠. 키오스크로 주문을 하고 다찌석 중앙의 모서리 자리에 앉았어요. 양쪽에 이미 손님들이 계셔서 왠지 그 자리에 앉아야 할 것 같았어요. 자리에 앉으니 조금 설렜어요. 보통 혼자 외식할 때는 돈 아끼려고 김밥이나 햄버거 같은 걸 먹는데, 무려 1인분에 만 원짜리 밥을 먹는다니 엄청 사치 부리는 기분이었어요.


음식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초 오픈 주방을 구경하느라 지루하진 않았어요. 남자 사장님께서 정성을 다해서 고기에 소스를 바르고 앞뒤로 뒤집어가며 구우시는 모습이 멋있었어요. 그리고 여자 사장님께서 물병과 종이컵을 가져다 주셨는데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에 제 기분도 좋더라구요. 전 물을 많이 마시는 편이라 일회용 생수병이 아닌 큰 물병인 점도 좋았어요. 종이컵은 살짝 아쉬웠지만요.


고기 굽는 냄새를 맡으면서 가게 안을 둘러보았어요. 처음 온 곳이지만 편안한 느낌이 들어서 왜 그런가 봤더니 전반적인 인테리어가 나무로 되어 있었어요. 다찌석과 4인석 테이블, 의자를 비롯해서 천장이랑 벽도 나무여서 따뜻한 느낌이 들었어요. 

장식도 깔끔했어요. 어떤 일식집은 갖가지 일본풍 장식들을 여기저기 놓아둬서 정신 사나운 곳도 있는데, 여긴 요란하지 않은 몇 장의 포스터와 작고 귀여운 피규어 몇 개만 있어서 눈이 편안했어요. 슬쩍 보이는 안쪽 주방도 깨끗해 보이고 선반의 집기들도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어서 위생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싶어 마음이 놓였어요.


매운 부타동

이런 생각들을 수첩에 적으면서 가방 잘 챙겨왔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주문한 '매운 부타동'이 나왔어요. 매운 걸 좋아해서 시킨 건데 예상하지 못한 청양고추도 듬뿍 올라가 있어서 너무 신났어요. 반짝반짝 윤기 나는 삼겹살을 보니 당장 먹고 싶었지만, 네모난 반찬 통에 담긴 빨간 단무지와 깍두기부터 접시에 덜었어요. 반찬을 많이 먹는 스타일이거든요. 와사비와 매운 미소장도 한 스푼씩 떠서 그릇 한 켠에 올려두고 같이 나온 온센 타마고(온천 계란)도 까서 밥 위에 올렸어요. 완전 부들부들한 반반숙 계란을 보는 제 마음도 몽글몽글해졌어요.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밥과 삼겹살을 크게 한 술 떠서 먹어보았어요. 일단 소스 맛은 짜거나 달지 않고 살짝 매콤해서 맛있었어요. 밥도 질지 않고 고슬고슬해서 제 스타일이었어요. 

그런데 아쉽게도 가장 중요한 삼겹살이 퍽퍽하고 질겼어요. 전 고기 질에 그다지 까다롭지 않은 데도 삼겹살이 엄청 건조한 느낌이었어요. 얇은 삼겹살을 숯불에 구워서 그런 걸까요? 이 맛있는 소스와 열심히 구우시던 사장님의 정성이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쉬운 마음에 혹시나 하고 원산지 표기판을 보니 돼지고기가 '미국산'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순간 단가를 올리더라도 더 맛있는 고기를 쓰시면 좋지 않을까 했는데, 한편으로는 한 그릇에 만 원이 넘으면 나처럼 아끼는 사람은 안 오겠다 싶기도 했어요. 그래도 고기만 좀 더 촉촉하면 더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남는 식사였어요.


그래도 한 그릇 싹싹 다 비우고 나와서 다시 센터로 걸어갔어요. 마침 가는 길에 노을이 지고 있었는데 은은한 주홍빛 하늘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왜 노을은 매일매일 봐도 볼 때마다 좋을까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는데 맞은 편에서 오시던 어떤 남성분도 잠시 걸음을 멈추시고는 노을 사진을 찍으시더라구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저도 저 분처럼 나와 비슷한 감성을 가진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해질녘 노을을 보며 느끼는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요.


아까 식당에서 밥 먹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어요. 제 오른편에 앉아 있던 남자 손님께서 반찬통에서 단무지랑 깍두기를 덜어가시길래 저도 미리 덜어야겠다 싶어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분께서 제가 기다리는 걸 캐치하시고는 말씀도 안 드렸는데 먼저 반찬통을 건네주시는 거에요. 감사하다고 말씀드리면서 머리로는 '저 분처럼 배려와 센스가 몸에 밴 사람 또 어디 없나' 하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다가 곧 '그럼 나는 그런 사람인가?' 하고 생각해 봤는데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런 사람을 바라기 전에 저부터 먼저 배려하는 자세를 갖춰야 할텐데 말이에요.




그냥 혼밥하는 건데 뭐 이렇게 말이 많나 싶기도 하지만, 저와 비슷한 분이 또 어딘가에 계시지 않을까 해서 글을 적어보았어요. 마침 센터에 돌아가서 읽은 책에 "섬세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주위 자극을 민감하게 받아들인다"라는 내용이 나오더라구요. 그동안 제 자신이 하나하나에 쓸데없이 의미 부여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걸 '섬세함'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을 들으니 조금 위로가 되었어요.


비록 부타동의 맛은 아쉬웠지만 사치 부리는 기분도 내고 제가 바라는 이성의 모습, 그리고 제 모습을 생각할 수 있었던 혼밥이었어요. 아름다운 노을은 덤이구요. 오늘처럼 앞으로도 일상 속에서 사소하지만 큰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느끼며 지낼 수 있다면 정말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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