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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미 Aug 30. 2024

세상의 수많은 "~해야 한다"

철없는 사람의 철없는 생각

오전 10시, 공복 11시간째.

내 뱃속에 살고 있는 또 다른 나 '먹보'는 밥 달라고 꼬르륵거리고 난리 났다.

배고프다. 매우매우.

하지만 지금 먹을 순 없다. 최소 1시간은 더 참아야 한다. 

공복 12시간을 채워야 나에겐 밥을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


이렇게 산 지는 몇 년 되었다.

다이어트를 시작했던 25살 때부터 이랬으니 어언 9년째다.

누군가 그랬다. '최소 공복 12시간은 지켜야 살이 빠진다'고.

물론 중간중간 그 규칙을 지키지 못하는 날도 있었지만

여행 같은 특별한 이벤트가 없는 평상시의 날에는 늘 이렇게 지낸다.

아무리 배고파도 참고 견디는 삶.

밥 두 공기도 거뜬하게 해치우는 대식가로 태어난 나에게 이는 '수행'이자 '고문'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적응되긴 했다. 꼬르륵거리면 물을 마시거나 정신을 다른 데로 돌리는 요령도 생겼다.


지금은 빡빡한 다이어트를 하진 않지만 그래도 공복 시간은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최근 들어 그 강박감이 더 심해졌는데, 유튜브의 많은 의사 선생님들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최소 12:12의 간헐적 단식을 지켜야 건강하다'고 말이다.

"~해야 한다"는 조언을 잘 받아들이는 나는 랜선 의사 선생님들의 처방도 착실하게 따르고 있다.




비단 공복 시간뿐만이 아니다.

요즘에는 해야 할 것, 지켜야 할 것이 뭐 이렇게 많은지.

유튜브에서 말하는 대로, 세상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하고 들자면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밥도 내 마음대로 못 먹지, 잠도 내가 자고 싶은 시간에 못 자지, 운동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못 한다.


아직 내 길도 못 찾고 방황 중인 나는 남들이 말하는 이른바 '자기 계발'의 규칙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그중에 하나가 '독서'다.

원래 나는 책 읽는 걸 좋아한다. 학생 때도 방학만 되면 도서관에서 책을 왕창 빌려서 방학 내내 읽었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졸업을 하고 나서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읽고 싶은 책을 찾아 읽었다.

그런데 유튜브에서는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독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 이런 책을 읽어야 한다, 최소 몇 권은 읽어야 한다, 읽고 나면 기록을 해야 한다...

책을 100권 읽고 나니 인생이 달라졌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독서 모임을 하며 의견을 나누는 것까지 해야 비로소 진정한 독서라는 말들도 많았다.


'새로운 사람이 되려면 시간을 달리 써야 한다'는 누군가의 또 다른 조언을 들은 나는

일말의 희망을 안고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따라 해봤다. 

내가 읽고 싶은 책 대신 남들의 '인생 책'을 찾아 읽었고

한 권의 책을 천천히 읽으며 음미하는 대신 추천도서들을 빠르게 읽어나갔으며

매주 집 근처 독서 모임에 나가 내가 읽은 책을 소개하고 다른 이들의 소개를 들었다.


그리고 책 읽는 게 재미 없어졌다

'숙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해야 할 게 무지 많은 '숙제'.

'이거 별로인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들 읽어야 한다고 하니 꾸역꾸역 읽었고

'얼른 이거 다 읽고 빨리 다음꺼 읽어야 하는데'라는 강박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하지?'를 생각하느라 책을 온전히 음미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아닌 머리로만 책을 읽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공복 시간 유지든 독서든 결국 '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게 목적이다.

그런데 내 몸이 보내는 신호와 나의 진실된 마음을 무시하면서까지

다른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과연 나한테 진정으로 '건강한' 것일까?

이 세상의 수많은 "~해야 한다"는 규칙을 지키려다 스트레스 받는다면

오히려 그게 건강을 해치는 건 아닐까?

그렇게까지 하지 않고도 지금껏 적당히 건강하게 살아왔는데 굳이 꾸역꾸역 뭔가 더 해야 할까?


모르겠다.

물론 다수의 사람들이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라면 분명 '좋은 것'일 테지만

'나'한테도 좋은 건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

"선별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나의 결론인데, 이것도 결국 "~해야 한다"다.

죽을 때까지 이 의무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드디어 11시다.

12시간 지났으니 이제 먹어도 되겠지.

잠깐, 근데 난 또 누구한테 허락받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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