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찍어온 점들#00
만 33살, 여자, 백수 5개월 차.
가장 최근에 했던 일은 제빵사이고, 그전에는 계약직으로 4년 정도 고등학교에서 지리를 가르쳤다. 동시에 임용고시를 준비했지만 최종 시험에서 1.5점 차이로 한 번, 5점 차로 또 한 번, 1차에서 한 번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려고 했으나 우울증이 심해져 응시도 하지 못하고 끝났다.
임용고시를 보기 전에는 대학원에서 도시 지리를 전공했다. 수업 조교와 학회 간사 등 일을 하면서 연구를 했으나 석사 ‘수료’까지만 했다. 일만 시키고 내 졸업 논문에는 무관심했던 지도 교수, 그 과정에서 당했던 여러 부당한 일 때문이었다.
취직은 생각도 안 했다. 자격증 학원 같은 걸 다닐 돈도 없었거니와 취직보다는 우리나라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연구자가 되고 싶었다. 학창 시절부터 대학생 때도 국가로부터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국가 장학금과 등록금 면제 등의 지원이 있었기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운을 서울대 입학에 다 써버린 탓인지 이후의 내 인생은 지금까지 줄곧 실패로 가득했다. 대학원 졸업도 임용고시도 제빵사도 내가 바랬던 일들은 다 실패로 끝났다. 죽음의 문턱에서 선택했던 제빵 일도 몸과 마음이 망가지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또다시 절벽 끝에 서 있었다.
더 이상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죽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또 피어올랐다.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인생인데, 앞으로 기대되는 것도, 더 이상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삶인데 살 이유가 있나?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럽기만 한데 버텨야 하나?
이런 얘기를 하자 상담 선생님께서 “왜 실패라고 생각하세요?”라고 물으셨다. 요즘 서울시 지원으로 받고 있는 심리 상담을 맡아주고 계신 선생님이시다. 왜 실패라고 생각하냐고? 실패했으니까 실패인 게 아닌가. 연구자도, 교사도, 제빵사도 되지 못했다. 도전했던 모든 일에 실패했다. 대학 친구들은 대기업 취직이며 공무원이며 변호사며 다 제 몫을 하고 있는데, 나 혼자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 가진 거라곤 심각한 우울증 밖에 없는 백수로.
그래서 글을 써보려고 한다. 나의 지난날들이 진짜 다 실패였는지, 그동안 헛된 인생을 산 것인지 돌아봐야 할 것 같아서. 여러 매체 중 하필 글인 이유는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걸 좋아했고 그나마 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요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유일한 일이자 실제로 성심성의껏 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또 실패로 끝날까 봐 감히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지는 못하고 있지만.
메모장에 혼자 써도 되는 글이지만 굳이 공개적으로 쓰고자 하는 이유는 '이런 사람도 살아가고는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다. 나도 다른 이들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고 위로를 받고 있기도 하다. 실패로 점철된 내 인생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다면 ‘내 실패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네’라고 정신 승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이고, 고생했네"라는 말을 듣고 싶기도 하다. 실패자의 구차한 자기변명일지 몰라도 그런대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는 생각한다. 결과가 실패여서 그렇지. 어쩌면 누군가는 "겨우 그것밖에 안 해놓고 좌절한다고?"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것도 괜찮다. 쓴소리를 듣고 정신 차리는 것도 필요하니까.
사실 두렵다. 누군가에게 내 인생을 드러내놓는다는 게. 당근이든 채찍이든 좋다고 말하지만 사실 약한 채찍질 한 번에 깊이 상처받을 거라는 걸 잘 알아서 무섭다. 그래도 써야겠다. 지금이 아니면 쓸 수 없을 것 같다. 지금 이 글을 써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자신감도, 능력도 없지만 아주 조금 남아 있는 용기로 나의 지난 실패를 되돌아 보자. 내가 좋아하는 책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에도 이런 말이 나오지 않던가.
"미래처럼 네가 모르는 일이 걱정될 때는 말이야,
네가 아는 것들을 되짚어 보는 게 좋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