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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고시를 포기했다, 살기 위해서

내가 찍어온 점들#01

by 끼미

고등학교에서 지리를 가르쳤었다. 정교사는 아니지만 기간제 교사와 시간강사로 총 2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지리 수업을 했다. 다행히 교사라는 직업이 적성에 맞았고 수업도 일도 재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라는 길을 떠나는 것을 선택했다. 내가 아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기엔 스스로 부족한 어른이라고 생각했고, 대학교 졸업장이 의미 없다는 걸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나였기에 아이들에게 “공부만이 살길이다!”라고 강요하는 것도 싫었다.


좀 더 솔직하게는 “비정규직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컸다. 정규직 교사가 되는 방법은 임용고시에 합격해서 공립학교에서 일하거나 사립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있는데, 요즘은 사립학교 시험도 위탁으로 진행해서 사립학교 정교사도 임용고시 1차를 봐야 응시할 수 있다. 어쨌건 정교사가 되려면 임용고시를 봐야 하는데, 나도 임용고시를 봤으나 3번이나 탈락하고 나니 더 이상 시험을 보고 싶지 않았다.




임용고시, 일명 임고는 첫 시험과 두 번째 시험에서는 2차까지 갔지만 최종 탈락을, 세 번째와 네 번째 시험에서는 1차에서 떨어졌다. 솔직히 이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오래 전 일이기도 하고 떠올리고 싶지 않아 묻어둔 기억이라 그런 듯하다(원래 기억력이 안 좋기도 하다). 아무튼, 경기도 수원에서 2차 시험을 두 번 본 건 확실하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 살 떨리고 피 말리던 시험장을.


필기로 치러지는 1차 시험은 괜찮았다. 교육학도, 지리도 공부하면 할수록 재미있었다. 문제는 2차 시험이었다. 면접과 수업 실연으로 진행되는 2차 시험은 지금 생각해도 다시는 치르고 싶지 않은 시험이었다. 면접은 그런대로 할만 했지만, 수업 실연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끔찍했다. 가뜩이나 긴장된 상황에서 한정된 시간 안에 기발한 수업안을 짜내고 그걸 또 능청스럽게 연기해 내는 건 창의성이라곤 1도 없는, 강의식 수업 체질인 나에겐 극복할 수 없는 벽이었다. 최악의 점수를 받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커트라인에서 멀지 않은 나의 1차 시험 점수를 합격권으로 끌어올려줄 점수를 받진 못했다. 더욱 더 나를 힘들게 했던 건, 같이 2차 시험을 준비했던 스터디원들 모두 합격했다는 것이다. 두 번 다.




2차 시험의 공포는 나에게 공황장애라는 병을 가져다 주었다. 어느 고등학교에서 시간강사로 일할 때였는데, 정교사 선생님 한 분과 함께 중간고사 시험감독을 들어가야 하는 날이었다. 나는 부감독으로서 교실의 뒤편에 얌전히 앉아있다가 정감독 선생님께서 부르시면 시험지와 답안지를 나눠주는 역할이었다. 처음 들어갔을 때는 괜찮았다. 그런데 교탁에 계시던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교실 뒤편에서부터 앞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지기 시작했다. 눈앞이 하얘지고 등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겨우겨우 교탁에 가서 뭔가를 하고(뭘 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다시 교실 뒤로 걸어가는데 심장이 심하게 쿵쾅거렸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하며 진정하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내 귀에서 심장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오고 누가 내 심장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쥔 것처럼 아프고 저렸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결국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다리를 이끌고 다시 교탁으로 가서 선생님께 정말 죄송하지만 몸이 안 좋다고, 집에 가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리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살면서 처음 겪은 공황장애였다.




그래서 포기했다. ‘교실'과 '시험’이라는 비슷한 환경에 놓인 것만으로도 숨이 쉬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진짜 시험을 치를 수 있을까. 그 후로도 수업하러 교실에 들어가면 공포스러운 2차 시험을 보러 온 기분이 들었다. 교실에 들어가는 걸 무서워하는 교사라니, 시험은 둘째 치고 당장 수업도 제대로 하기 힘든 판국이었다. 가만히 서서 숨을 고르는 나에게 아이들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교실에서 또 뛰쳐나갔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하고 응시하려고 했던 2020년의 시험은 결국 원서 접수조차 하지 못했다. 원서 접수가 시작되기 며칠 전 당시 내 곁을 지켜주는 유일한 존재였던 나의 반려 고슴도치, 우리 딸 까까가 떠났기 때문이다. 3번의 임용고시 낙방으로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내 멘탈은 어두운 반지하 자취방에 홀로 남겨진 상황을 견디지 못했다. 고향에서 고생하고 있는 엄마 생각에 그래도 시험장에 가보기는 해야겠지 싶어 온라인 채용 사이트에 들어갔지만 역시나 화면을 보자마자 숨이 막혀왔다. 그때 느꼈다. ‘아, 진짜 안 되겠다’라고. 교사도 살아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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