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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복치다

개복치에 대한 오해와 진실

by 끼미

“선생님, 저는 개복치예요.”


다소 뜬금없는 나의 말에 맞은편에 앉아계시던 상담 선생님께서 “개복치요?” 하시면서 웃으셨다. "끼미님이 약한 게 아니라 누구나 그 상황이면 힘들어요."라는 위로의 말을 덧붙이시면서. 두 달 전부터 서울시에서 진행하는 ‘청년 마음건강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무료로 상담을 받고 있다. 상담받을 때마다 울었다던 친구의 말처럼 나 역시 일주일에 한 번 상담실에 갈 때마다 탁자 위에 놓인 휴지를 쓰며 5년 동안 쌓인 응어리를 풀고 있다.


상담 시간에는 보통 나의 지난 실패들을 끄집어 낸다. 상처를 직면하고 다시 바라보아야 마음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했다. 대학원 졸업 실패와 임용고시 실패, 제빵사라는 새로운 도전에의 실패... 그러다 문득 힘든 순간마다 견디지 못한 과거의 나, 반복된 실패로 바닥에 엎어져 있는 지금의 나를 생각하니 ‘개복치’라는 물고기가 떠올랐다. 어느 게임 속에서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는, 유리 멘탈의 상징인 개복치.


그래, 난 개복치야.




그로부터 며칠 뒤 유튜브 알고리즘이 노래 한 곡을 추천해 줬다. 가수 윤하님의 ‘태양물고기’라는 곡이었다. ‘태양물고기’가 무슨 말인가 했더니 ‘개복치’의 영어 이름인 ‘sunfish’를 한국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마침 상담 때 말했던 “나는 개복치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는데 제목이 ‘개복치’인 노래가 새로 나오다니, 이건 나를 위한 노래임이 분명했다.


운명이라는 게 있는 걸까 생각하며 듣는데 이번에는 알고리즘이 윤하님의 인터뷰를 추천해 주었다. 인터뷰 속 윤하님은 개복치를 툭하면 죽는 물고기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개복치는 해수면과 심해를 오가는 아주 강인한 물고기라며 전 세계의 개복치를 대신해서 진실을 알리고 계셨다.


잠깐, 개복치가 강하다고?


인지 부조화를 풀기 위해 챗GPT에게 개복치에 대해 물어봤다. 과연 윤하님의 말대로 개복치는 스트레스에 취약하긴 해도 그 어떤 물고기보다 강인한 존재였다. 복어과를 의미하는 ‘복치’ 앞에 못생겼다는 이유로 ‘개’라는 글자가 붙었다는 개복치는 수심 200~600m의 깊은 바다에서 먹이를 잡아먹은 뒤 해수면 가까이로 올라와 햇볕을 쬐며 체온을 회복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드넓은 바다 위에 둥둥 떠서 햇빛을 충전하는 개복치’. 그 모습을 상상하다 보니 그동안 아등바등 애쓰며 살아온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실패와 좌절에 빠져 허우적대면서도 어떻게든 햇볕을 찾아다녔던 지난 날의 나.


개복치와 나의 공통점은 하나 더 있었다. '느리다'는 것. 개복치는 거대한 몸체에 비해 지느러미가 작아서 다른 물고기들에 비해 헤엄치는 속도가 느리고 방향 전환이 서툴러 바위 등에 부딪혀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작은 지느러미', '느린 속도', '서툰 방향 전환'. 개복치를 나타내는 이 단어들은 나를 표현하는 키워드와도 같다. 간장 종지처럼 작은 그릇으로 태어나 주변 친구들에게서 한참 뒤처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는 지금의 나.


나는 진짜 개복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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