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사람의 철없는 생각
얼마 전 생애 첫 소개팅을 했다. 그동안의 만남은 지인에서 시작한, 일명 자만추로 이루어진 만남이었기에 이름과 직업만 알고 이성을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첫 만남에서 첫 만남 이상의 것을 원하는 가치관은 유교걸인 나와는 맞지 않았다. 호감의 신호가 사실은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에 씁쓸함이 남은 만남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 불현듯 밀려온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 가까운 안양천으로 산책을 나섰다. 보름을 지나 조금씩 자신의 오른쪽 얼굴을 숨겨가고 있는 달 아래 시원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걸었다. 저 깊은 바다로 가라앉은 이 감정에 빠져들고 싶어 일부러 슬픈 노래를 듣다가 윤하님의 《먹구름》이라는 발라드를 듣게 됐다. 이별 후 홀로 남겨진 마음을 먹구름 낀 흐린 날씨에 비유한 곡이었다. 가사에 집중하며 걷던 중 귀에서 들려오는 이 가사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참 보고 싶어 /
길을 걸을 때 나를 감싸주던 / 따스했던 네 맘이 그리워 /
발을 맞추며 설레어하던 / 사랑했던 우리가 그리워"
갑자기 전 남자친구가 떠오르면서 울음이 터졌다. 4년 전 갑작스럽게 카톡으로 이별 통보를 받았던 어느 날,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서 남자친구가 사는 동네로 찾아갔던 그 날, 마지막으로 하루만 더 만나달라고 지하철역 개찰구 앞에서 울었던 그 날 밤. 그 이후로 한 번도 마음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슬픔이 4년만에 쏟아져 나왔다.
3년 반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내며 최선을 다했기에 헤어짐이 슬프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이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곁을 떠난 고슴도치가 보고 싶어서 운 적은 수없이 많았지만 전 남자친구가 생각나서 운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내 본심은 그게 아니었나보다. 사실은 슬프지 않았던 게 아니라 애써 괜찮은 척 스스로를 속였던 것이었다.
내 살 길부터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별의 슬픔에 잠겨 있을 시간도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던 지도 모른다. 그리움에 파묻히고 싶지 않아서, 혹여나 술 마시고 전화라도 할까봐 걱정돼서 내 시선을 먼 미래와 나 자신에게 맞추었던 걸지도. 너무나도 좋아했었던 사람이었기에, 갑작스럽게 맞이한 헤어짐이기에 극 F인 내가 슬프지 않을 리가 없는데 그동안 아무렇지 않은 척 가장하며 지냈었다는 걸 수많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어떤 슬픔은 한참 뒤에야 찾아온다. 날카로운 상처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깊은 늪에 잠겨들 자신이 두려워서 애써 못 본 척 하지만 그런 슬픔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잘 되지 않은 소개팅이든 슬픈 이별 노래든 예상치 못한 것들이 트리거가 되어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뒀던 진심을 기어코 끄집어 내고 만다. 머리는 결코 마음을 속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