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글
요즘 나에게 일자리가 생겼다. 아흔 살 시어머니와 삼식이 남편의 식사와 뒷바라지에 은근히 짜증이 쌓여가던 터에 때마침 운 좋게 근처 초등학교에서 봉사직으로 도서관 관리 일을 잠시 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점심시간이나 정규 수업을 마치고 방과후 수업 시간까지 잠깐 비는 시간에 몇 명씩 들렀다가 간다. 정거장이나 휴게소 같은 역할이다.
애들은 책을 골라서 읽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웃고 얘기를 나누기도 하는 게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거의 다 3~4학년이다.
그런데 그중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고학년으로 짐작되는 남자아이인데 조용한 아이로 혼자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책을 읽다 가곤 했다. 특이한 점은 눈치를 많이 살피는 듯했다. 누군가 애가 도서관에 오는 걸 눈치라도 준 것일까. 마음이 쓰였다. 그러다 애를 불러서 학년이랑 이름을 물어봤다. 애는 내 눈치를 보면서 알려준다. 그런 애한테 책 좋아하냐고 물어보니 "네" 하고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난 애한테 편안하게 책 많이 읽으라고 독려를 해줬다.
난 그 옛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 깡촌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는 집에서 한 오리쯤 떨어져 있는 곳에 있어 걸어 다녔다.
초등 2학년쯤에 삼촌이나 오빠들이 빌려온 만화책으로 책에 입문했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처음 읽은 만화책의 제목이 "이상한 머플러"로 기억이 생생하다. 머플러란 외래어도 생소했지만, 주인공이 나무나 꽃이나 장독이든 뭐든 되고 싶은게 있으면 그 머플러를 목에 두르기만 하면 다 되는 진짜 신기한 것이었다.
내가 만화책에 코를 박고 상상의 세계에 빠져서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아버지가 내심 궁금하셨던지 슬쩍 당겨서 보시더니 "헛 참! 거짓말도 자~아알 한다." 하셨다.
"아부지요. 진짜 이게 거짓말인기요?"
"그라머 거짓말이지 이게 진짠 줄 아냐? 이 바보야"
아! 그 순간 난 내 동심이 와장창 작살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 후로 난 학교에 가면 열리지 않는 도서관 앞에 늘 맴돌았다. 도서관 선생님께 책 빌려주지 않느냐고 애처롭게 물어보곤 했다. 그때마다 그 여선생은 매정하게 도리질을 해댔다. 내가 매우 귀찮은듯 보였다. 3학년이 되면서 담임 선생님이 바뀌었다.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아이들 사이엔 입이 삐딱한 무서운 선생님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막내 삼촌도 그 소문에 한몫했다. 삼촌의 작년 담임이었으니까 믿을 만했다. 선생님은 소문대로 입이 삐딱하셨다. 그럼 무서운 것도 진짜일 것 같았다
난 키가 작고 왜소해서 늘 맨 앞줄에 앉았다. 한참 동안은 쫄아서 선생님 눈치만 살폈다.
그러던 어느 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쯤 도서관 유리창에 붙어서 안을 들여다보는 나를 선생님이 보시고 부르셨다. 혼내키려고 그러시나 싶어서 낡은 검정 고무신만 내려다보고 터덜터덜 힘없이 선생님께로 걸어가니, 왜 집에 안 가고 있냐고 삐딱한 입으로 물으셨다. 난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책이 보고 싶어서 그랬다고 했다.
선생님은 그런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허허허... 하고 환하게 웃으셨다. 이튿날부터 나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선생님이 매일 도서관에서 책을 한 아름씩 가져다주시는 것이었다. 내가 좋아 어쩔 줄 모르고 입이 바소쿠리 마냥 벌어져서 그 책을 품에 덥석 안으면 선생님은 그렇게 좋으냐고 웃으셨다.
그때 책이 육 학년 교실에도 일부 분산돼서 보관 중이었는데 그 교실엔 막내 삼촌이 있었다. 어느 날 내가 집에 책을 한 보따리 들고 가니 막내 삼촌이 뭐 좀 아는 체를 했다.
"야~~ 이거 이거 느그 입 삐땍이 선샘이 가져간 거네"
아마 우리 선생님이 삼촌 반 수업 시간에 들어가셔서 책장을 열고. 가져오신 모양이다. 삼촌은 신이 나서 입을 삐딱하게 만들고선 책 꺼내서 가져가신 선생님 흉내를 냈다. 그땐 너무 약이 올라서 힘만 있다면 삼촌에게 막 덤벼들어서 쌍코피가 터지게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그 후로도 선생님은 날 위해서 늘 책을 빌려다 주셨고, 그런 선생님은 내가 숙제를 해가지 않았을 때는, 늘 배가 아파서 숙제를 못 했다는 뻔한 나의 거짓말에도 알고도 모른 체 넘어가주셨다.
선생님은 입은 비록 삐뚤 하셨지만 우리집에서도 모르는 미운 오리 새끼 같은 나의 튀는 감성을 잘 알아주셨고, 국군 아저씨께 쓴 위문편지를 반 아이들 앞에서 낭독하게 하고, 글짓기반에도 보내 주며 날 처음으로 백조처럼 인격적으로 인정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던, 잊지 못할 나의 진정한 참 스승이자 내 어린 날의 우상이셨다.
그때 읽은 책은 아직도 나를 피터 팬으로 하늘을 날게 한다.
그 도서관 여선생의 도리질만 아니었다면 그래서 더 많은 책을 만났더라면
난 다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 골똘히 생각에 잠긴 나에게
"안녕히 계세요"
그 옛날의 또 다른 나 같은 그 애가 나즈막히 들릴 듯 말듯 인사를 하고 도서관을 나선다. 난 따뜻한 미소로 그 애의 인사에 답해준다
'애야 너의 멋진 인생을 위해 내가 응원한다'
그 옛날 나의 선생님처럼 마음속으로 그 아이의 머릴 쓰다듬어준다.
슈르르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