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립 김동우 Sep 15. 2017

숙제 같은 여행

India


보고 싶지 않은 풍경이 막무가내 밀려들 때가 있다. 주체할 수 없는 생경한 풍경이 뿌연 먼지 사이를 헤집고 진한 땀내를 남긴다. 울어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손을 내밀기엔 용기가 없다. 그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얼굴로 먼지를 한바탕 뒤집어쓰고 옴짝달싹하지 못할 뿐.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나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그리고 막무가내 풍경들은 더는 막무가내가 아닌 게 된다.

인도를 처음 방문했을 때다. 공항을 빠져나와 지하철을 타고 뉴델리에서 여행자들이 가장 몰린다는 빠하르간지로 향했다. 인도 지하철은 예상과 달리 퍽 현대적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열차 안에서 그간 들은 인도 무용담이 하나둘 떠올랐다. 좋아서든 싫어서든 여행자 사이에서 가장 많이 회자하는 여행지에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간 인도에 대해 들은 내용만 추려도 책 몇 권 분량은 될 듯 싶었다.
인도를 제외하고 히말라야에 걸쳐 있는 모든 나라를 여행해 봤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인도만은 마음이 쉬 가질 않았다. 수많은 무용담에 한 가지 에피소드를 더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인도는 내게 숙제 같은 나라였고 그렇다고 외면만 하고 있기엔 뭔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찝찝함이 남는 그런 곳이었다.
열차에서 내려 뉴델리역을 빠져나오자 악마의 입김 같은 인도의 여름이 온몸을 휘감는다. 순식간에 땀이 관자놀이를 지나 뺨을 타고 흐른다. 이글거리는 아지랑이가 가득한 7월 델리의 낮은 모든 걸 증발시킬 기세다. 거리의 사람은 이 열기에 맞서 싸우기라도 하듯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순간 현기증이 찾아왔다. 눈앞이 아찔한 흰색으로 탈색된다. 머릿속은 지독한 날이란 생각뿐이다. 잠시 눈을 감고 가야 할 길을 더듬거렸다.
눈을 떠 보니 길 위에 피어오른 아지랑이를 헤집고 아이를 품은 여인 하나가 다가오고 있다. 한눈에 봐도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이라 불리는 사람. 그녀는 브라만(승려), 크샤트리아(왕이나 귀족), 바이샤(상인), 수드라(피정복민·노예, 천민) 등 4단계로 이뤄진 카스트제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불가촉은 접촉하면 안 되는 사람들, 영어로는 Untouchable이라 표현한다. 세상 어디에 이보다 더 슬픈 단어가 또 있을까.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흐릴 것 같은 큰 사슴 같은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그리곤 소리 없이 내 가슴팍에 때가 낀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들이 왜 불가촉천민이라 불려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내게 그녀는 그 이유를 알려주는 대가를 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내 젓는 내게 그녀는 다른 손으로 아이를 들썩인다. 이어 가슴팍에 있던 검은 손을 오므리고 입으로 가져가 먹는 시늉을 했다. 돈이 아니라면 배를 채울 무엇이든 달란 이야기다. 난 고개를 내 저었다. 그러자 그녀는 들고 있던 물통을 달라고 했다. 물통을 건넸다. 아이는 내가 먹다 만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본다. 아이 얼굴에 아주 잠깐 행복이 머문다. 그리고 이내 엄마의 몸에 스러지듯 얼굴을 묻고 눈을 감는다. 아이의 이마에도, 그녀의 이마에도, 내 이마에도 같은 땀이 흘렀다. 이 장면에서 가장 불행했던 건 그들을 보고 뒷걸음쳐 그 자리를 도망치듯 떠날 수밖에 없던 나 자신이었다.
입안에 모래가 있는 듯 까끌까끌한 느낌을 안고 빠하르간지 메인바자르에 도착했다. 숙소를 찾아가기엔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너무 벅차다. 혼돈 속에 발걸음을 어디로 옮겨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공간을 보고 서 있자 무릎에 힘이 빠질 것만 같았다. 지독한 더위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소음이 더해지고 혼돈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무질서가 더해졌다. 소란스러운 적막감에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주변에 여러 명이 몰려들어 있었다. 누군 숙소에 가자고 했고, 누군 릭샤에 타라고 했고, 누군 기념품을 사라고 했다. 이리저리 허정거리는 걸음, 제대로 중심조차 잡지 못하는 몸의 반은 그들이 가져간 셈이었다. 휙 하고 코앞에서 인도의 진한 향신료 냄새가 지나갔고, 잠시 뒤 소변 지린내와 소똥 냄새가 들이닥쳤다. 두려운 자동차 경적이 내 등을 떠밀 듯 쫓아왔고 여행자를 외면하지 않는 수많은 시선도 걷는 내내 나와 함께했다.
셔츠가 흠뻑 젖은 채 빠하르간지 한쪽 좁은 골목 끝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볕이 들지 않은 칙칙한 방, 주인은 그래도 덜덜거리는 고물 에어컨이 있다며 제값을 다 받으려 했다. 숨을 돌리고 다시 거리로 나와 빠하르간지를 톺아보자 그런대로 그 안엔 룰이 존재했다. 규칙 없는 규칙 속을 채우고 있는 오토 릭샤, 사이클 릭샤, 택시, 자가용, 소, 당나귀, 마차 등은 나와 무관하게 그들만의 규칙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숙제 같던 습하고 까끌까끌한 인도 여행의 시작.





_Photo Info
Leica M-P(typ240) + Summicron-M 1:2 / 28mm ASPH
2017, Agra, India © Kim Dong Woo
Copyright 2017, Kim Dong Woo All Rights Reserved.
All Pictures Can 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Instagram_ https://www.instagram.com/road_dongwoo

작가의 이전글 예수를 찾아 스리나가르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