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델리 레드 포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주인도 영국군 총사령부(이하 영국군) 주둔지로 사용되던 곳이다. 우리에겐 한국광복군 ‘인면전구 공작대 印緬戰區工作隊 ’ 활동지로 의미가 크다. 인면印緬은 인도와 버마를 뜻하고 전구戰區는 전투 지역을 말한다. 이를 이어 붙이면 인도 버마 전투 지역에 파견된 공작대가 된다. 인도에 간 광복군, 좀 생소한 이야기지 않나. 그들은 누구였고 어떻게 인도까지 가게 된 걸까.
1942년 가을, 영국군은 김원봉이 이끄는 민족혁명당과 접촉한다. 공작원 파견이 논의된다. 최성오, 주세민 등 두 명의 대원이 먼저 인도, 버마 전선에 파견된다. 아마도 그들의 성과가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 달 남짓한 짧은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더 많은 인원을 요청해온다. 이에 김원봉과 콜린 맥켄지 Colin MacKenzie 영국군 사령관은 1943년 5월 ‘조선민족군선전연락대 파견에 관한 협정’을 체결한다. 이 협정에 따라 민족혁명당과 영국군은 일본군 포로를 신문하고, 대적對敵 선무 방송(심리전의 한 형태로 보통 군사작전 을 지원할 목적으로 작전 전후 실시하는 선전 방송을 일컫는다)으로 적군을 회유하는 등의 특수전을 펼쳐나가기로 한다. 요즘으로 치면 심리전단 활동에 관한 내용이었다. 한인 병력들은 일본인과 겉모습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일본어에 능했다. 무엇보다 정신적으로도 잘 무장돼 있었다. 일본군과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이고 있던 영국군에겐 없어선 안 될 병력이었다.
협정 체결 이후 실제 공작대 파견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통해 이뤄진다. 이때쯤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 로 편입됐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광복군을 지휘 통솔하던 중국군사위원회 또한 이 문제를 임시정부 내에서 처리해주길 원했다. 광복군 총사령부는 곧바로 공작대 선발에 나선다. 신체조건은 물론이고 일본어와 영어 등 어학능력이 뛰어난 최정예이어야만 했다. 그렇게 공작대 대장에 한지성, 부대장에 문응국이 임명되고 김상준, 김성호, 나동규, 박영진, 송철, 이영수, 최봉진 등 총 아홉 명이 1943년 8월 중국 충칭을 떠나 인도로 향한다. 그들은 레드 포트와 콜카타 등에서 1943년 연말까지 선무 방송, 전단 작성, 문서 번역, 암호 해독 등을 체계적으로 훈련받는다.
이 과정에서 에피소드가 하나 만들어진다. 당시 인면전구공작대 대원들은 훈련의 일환으로 영어 교육을 받게 되는데 교육장은 델리에서 남쪽으로 17킬로미터 떨어진 가지아바드 Ghaziabad 인그라함 학교였다. 유일하게 레드 포트가 아닌 곳에서의 훈련이었다. 공작대원들은 여기서 뜻밖의 인연을 만나게 된다. 당시 인그라함 학교 교장은 미국인 프랭크 윌리엄스 Frank E. C. Williams 였는데 그는 1906년 충청남도 공주에 영명학교를 설립하는 등 35년간 한반도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사람이었다. 영명학교는 유관순 열사의 모교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윌리엄스는 파란 눈의 한국인이었다.
끔찍이 한국을 사랑했던 윌리엄스는 1940년 11월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다. 그리고 일본 고베를 거쳐 인도로 향한다. 교육 사업을 계속 이어나가겠단 뜻이었다. 그런데 인도에서 한국광복군을 만났으니 이 얼마나 극적인가. 우리말이 유창한 미국인 감리교회 선교사와 인면전구공작대의 첫 만남은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 순간이 었을까. 그들은 혹시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진 않았을까.
<김동우 작가는>
2017년 인도여행 중 우연히 델리 레드 포트가 한국광복군 훈련지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부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10개국에서 작업을 이어 왔다. 크게 관심받지 못했던 작업이 전시 출판 등으로 조금씩 알려지자, 유퀴즈온더블럭 광복절 특집편 출연 등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 전국 각지에서〈뭉우리돌을 찾아서〉전시를 열어왔으며 지은 책으로는《뭉우리돌의 바다》,《뭉우리돌의 들녘》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