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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립 김동우 Mar 21. 2024

돌아 올수 없던 사람들

멕시코 서문

내 집에서 남의 싸움을 지켜봐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조선은 열강의 각축장이 돼버린다. 주변국의 헛기침 한 번에도 눈치를 봐야 하는 초라한 처지, 1894 년 서해 풍도 앞바다에서 시작된 청・일 전쟁은 조선의 나약함을 잘 보여주는 예다. 급기야 1904년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일 전쟁까지 발발한다. 고종은 무기력했고 정쟁만 일삼던 위정자들은 자기 배를 채우기 바빴다.


그러던 중 1905년 4월 제물포에서 상선 한 척이 출항한다. 1,033명의 사람들이 좁은 선실을 가득 채웠다. 누군 부모의 손을 잡고 배에 올랐고, 누군 홀로 선실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이 향한 곳은 묵서가 墨西哥 라 불리는 멕시코였다. 그 누구도 어떤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배 안은 눈 뜬 장님들로 가득했다. 아무도 나라를 떠나겠다는 이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이민 브로커가 저지른 불법을 탓하는 사람도 없었다. 신문에 버젓이 광고까지 내며 이민자를 모집하던 이들은 무사히 제물포를 떠나며 아마 야릇한 미소를 지었을 거다.


멕시코에 도착한 한인을 반긴 건 이들을 값싸게 부릴 수 있는 농장주뿐이었다. 말에 올라 그들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농장주들은 매의 눈으로 힘이 세고 빠릿빠릿한 사람들을 하나둘씩 골랐다. 더러는 가족끼리 생이별을 해야 했다. ‘인간시장’이 따로 없는 애잔한 풍경 이지 않았을까. 뒤늦게 이 선택을 후회해 본들 바꿀 수 있는 게 없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더듬어도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만이 눈에 밟혔다. 파라다이스가 펼쳐질 거란 헛된 꿈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애니깽 농장, 메리다 © Kim Dong Woo


메리다 Merida 주변 애니깽(Anniquin, 우리말로 용설란이라고 하는데 높이는 1~2미터이고, 다육질 잎 20~30개가 달린다. 5~6년 지난 잎에서 섬유를 추출한다. 잎은 두껍고 청백색이며 끝과 가장자리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 멕시코에서 많이 재배하며 한인들이 애니깽 농장에서 일할 당시에는 선박에서 쓰이는 밧줄의 원료가 됐다. 지금은 주로 술을 빚는 용도로 쓰인다) 농장으로 뿔뿔이 흩어진 한인들은 그렇게 4년간의 계약 노동을 시작한다.


체념한 듯 애니깽을 자르고 날랐다. 한인들에겐 낯설기만 한 일이었다. 날카로운 가시에 찔리고 베여 상처투성이가 되기 십상이었다. 때론 채찍을 드는 농장도 있었다. 하루 일해 식비를 내고 나면 손에 쥐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돼지보다 싼 몸값이었고 노예와 비슷한 대우를 받았지만 그래도 살아야 했다. 고향에 돌아가려면. 그 이유야말로 혹독한 농장 생활을 견디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그랬던 꿈이 일제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다. 그럼에도 이들은 포기가 아닌 분투를 선택한다. 멕시코 땅에 쓰인 우리 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


<김동우 작가는>

2017년 인도여행 중 우연히 델리 레드 포트가 한국광복군 훈련지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부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10개국에서 작업을 이어 왔다. 크게 관심받지 못했던 작업이 전시 출판 등으로 조금씩 알려지자, 유퀴즈온더블럭 광복절 특집편 출연 등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 전국 각지에서〈뭉우리돌을 찾아서〉전시를 열어왔으며 지은 책으로는《뭉우리돌의 바다》,《뭉우리돌의 들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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