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
그냥, 좋았었다.
내 잘못을 대신 해결해 주는 게.
그리고, 당연했다.
의식주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줬던 게.
살면서 자급자족해야 할 일이 이렇게나 많았고, 하고 싶었던 일들도 많았다는 사실을 아주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다.
전조증상은 늘 있었다. 정상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 눈에는 우리가 이상해 보이기 때문에 그동안 끊임없이 경고의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옆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한 귀로 흘리며 서로가 원하는 쉬운 길을 선택해 가며 꿋꿋이 걸어왔다.
EP. 2 그것의 이름은 '조종'
엄마는 집에서든 밖에서든 혼자 제일 바빴다.
자신의 일도 자기가 하고, 자식들이 해야 할 자질구레한 일들도 자기가 했다. 예를 들어 집안일 중에서는 요리와 설거지. 결혼하면 평생 할 거라며 손도 못 대게 했다. 속옷도 엄마가 사줬다. 내 나이 39살까지. 사주는 게 늘 편해서 내가 사서 입어야겠다는 생각자체를 하지 않았다. 팬티가 너덜 해질 때쯤이면 늘 새 팬티가 옷장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위아래 내 속옷사이즈를 정확히 모르고 어떻게 골라서 사야 하는지 아직도 어색해 죽을 맛이다.
대학 2학년 때 아르바이트를 너무하고 싶어서 일 년간 조르다가 결국 몰래 학교 내 서점에서 일을 구했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이 첫 번째 사회생활에서 '내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는 내 할 일을 잘 해내자.'라는 아주 뜻깊은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일찍이 못 깨달았을 경험이었을 거다. 그리고 이 일을 하겠다고 일 년간 졸랐던 것 또한 엄마가 말려서였다. 차라리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는 게 낫다는 게 그 이유였다.
난 아직도 엄마의 '안돼.'의 기준을 모른다. 일관성이 없어서 기준이라는 게 있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늘 시키는 대로 했다. 자의적으로 움직였다간 어떤 불이익이나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내가 '싫다.'라고 하면 엄마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하게끔 유도를 했다. 그래도 내가 2차 '싫다.'라고 하면 할 때까지 어르고 달래며 끈질기게 밀어붙여서, 이것에 질려버린 나는 끝끝내 백기를 든다. 나와 관련된 대부분의 일들은 여태껏 이런 식으로 처리되어 왔었다.
우리 집 베란다 창문 블라인드 설치를 3년 내내 닦달했던 게 하나의 예다. 나와 남편은 안 해도 된다고 3년 동안 말했지만 엄마는 언제나 그랬듯 포기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문자로, 전화로, 만나서는 핀잔주기도 하고 혹은 살살 달래며 이를 끊임없이 반복재생을 했다. 그 당시 나는 베란다의 '베'만 들어도 스트레스가 올라오고 엄마가 베란다 쪽으로 가기만 해도 또 블라인드얘기할까 봐 조마조마하며 긴장을 했었다.
이렇듯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끔 나를 달래고 다그쳤던 이 방식, '조종'이다.
EP. 3 소름 돋는 사실은,
나는 내 생각과 의견은 대부분 무시당한 채 조종당하며 살아왔다. 물론 함께 살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엄마니까. 나에게는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존재, '엄마'니까. 다 나를 위해서 하는 거라고 하는데 여기에다대고 "다 헛소리야!! 나보다 엄마가 그러고 싶으니까 하는 핑곗거리잖아!!!"라고는 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더군다나 그 당시에는 이런 생각 자체도 못 했었고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지금은 그것의 정체를 안다. 대부분의 것들이 '자식을 위함'을 빙자한 본인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갔던 거란 걸.
그리고 여기서 소름 돋는 사실은,
나도 엄마와 똑같이 아이들에게 내가 원하는 대로 조종을 하고 있었다는 거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의 일이다.
둘째가 트리 위에 고깔모자 장신구를 올리려고 하는데 마침 그 자리에는 노란 별이 달려있었다. 그걸 본 나는 둘째가 뭘 하려는지 미리 예상하고 명령조로 말했다.
"별 떼고 고깔모자 올려."
하지만 둘째가 내 말대로 안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별 위에다 고깔모자를 씌우려고 하자 여기서 또 내가,
"꼭대기의 별을. 떼고. 모자를. 올려!"
라며 큰소리로 강하게 말하자 남편이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다가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통제하려고 하지 마. 하고 싶은 대로 냅둬."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통제하려고 했다고? 이렇게 말하는 게?' 이런 생각이 들면서 또 엄마가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늘 했던 말투와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가 또 엄마처럼 말했구나.' 깨달으면서 순간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바로 앞에 둘째가 날 쳐다보고 있었기에 후딱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표정을 살폈다. 안쓰럽게도 손에는 아직도 고깔모자를 든 채 어쩔 줄 몰라하며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도 수없이 겪어봤기에 둘째의 지금 심정이 너무나도 이해가 돼서 최대한 친절한 말투로 바꾸며 말했다.
"도경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말 끝나기 무섭게 둘째가 별 위에다 고깔모자를 씌웠다. 그리고는 만족했는지 웃으며 트리를 잠시동안 바라보았다.
이럴 때 곁에서 날 잡아주는 남편이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앞으로 '통제하려는 강요의 마음'이 생길 때마다 하나, 둘씩 이것을 지우다 보면 언젠가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라는 기대도 조심스레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