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날의 기도(들풀 어른동화 18)

"객구야, 물러나라. 으시사!"

by 들풀

동짓날의 기도 동짓날 새벽입니다.

"야, 야 일어나라!"

국민학교 3학년인 나는 부스스 눈을 뜹니다. 벌써 엄니는 목욕을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고 앉아 계십니다. 나는 서둘러 세수를 하고 엄니를 따라 나섭니다.엄니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조심조심 산 쪽 샘으로 갑니다. 만약 개가 짖거나 사람이라도 만난다면 엄니는 "정신이 부족하여 그리되었다"며 크게 한탄하십니다.

꽁무니에 불을 붙인 소지종이가 날아오릅니다.

샘에 도착해서는 우선 하얀 문종이를 깔고 위에 북어 한 마리와 사과 그리고 몇가지 나물을 진설합니다. 엄니는 두 손을 싹싹 빌면서 마치 주문을 외듯이 낮은 목소리로 기도를 합니다.


"산(山)반, 물 반, 동해 용왕님, 서해 용왕님, 남해 용왕님, 올 한 해도 집안에 큰 우환없이 지나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더. 그라고 명년 한 해도 또 우짜덩가(어찌하든지) 우리 군대간 큰 아들, 무사히 군생활 무탈하게 마칠 수 있게 해 주옵시고 마지막으로 이 철없는 막내아들, 우짜덩가 공부 잘하고, 잔병없이 또 한 해를 보내게 해 주옵소서!"


그러고는 할머니, 아버지를 비롯하여 우리 팔남매의 한 해 운수가 길하기를 빌면서 소지 종이에 불을 붙여 날려 보냅니다. 소지 종이는 엄니의 기도에 답이라도 하듯 컴컴한 하늘을 잠시 밝히다가, 마침내 빠알간 불꽃이 휘날리며 너울거리며 날아갑니다.


엄니는 따로 마련한 자그마한 사과를 내어줍니다. 나는 그걸 아삭아삭 씹어 먹으며 엄니 손을 잡고 내려옵니다. 동짓날 초저녁에 엄니는 붉은 팥물을 먼저 끓여 내서는 헛간과 변소, 마구간, 대문에다 뿌립니다. 그 이후에야 나는 팥죽 맛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빨리 어른이 되려고 새알을 많이 먹으려고 하지만 밀가루로 만든 새알은 입에서 겉돕니다. 그래서 찹쌀로 새알을 빚은 아지매 집에서 쑤어 온 팥죽을 기다립니다.


엄니는 형님들이 군대가고 난 뒤에는 정화수를 떠놓고 항상 기도를 했습니다. 우선 깨끗이 머리를 빗고 남들이 일어나지 않는 새벽에, 우물에서 물을 한동이 이고 옵니다. 그리고 그 물동이에서 한 사발을 뜨고는 장독대 위에 놓습니다. 그리고는 또 하늘을 우러러 보며 간절히 빕니다. 그 기도 덕택으로 우리 4형제는 모두 무탈하게 군대에 다녀 올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팔남매, 무사하게!

어머니의 기도는 할머니의 기도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기도는 훨씬 애절합니다. 할머니의 기도소리는 숫제 우는 목소리로 가득합니다. 어느 겨울날 나는 갑자기 급체에 걸렸는지 배가 아파 떼굴떼굴 구르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는 엄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며눌아야! 아무래도 야한테 객구(객귀)를 물려야겄다. 준비 좀 해라."


엄니는 짚단과 칼과 물 한사발, 그리고 팥 한줌을 준비합니다. 할머니는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습니다. 나는 오돌오돌 떨면서 마당 한가운데 섭니다.

할머니는 짚단에 불을 붙여서 오른 손에 들고, 왼손에는 우리 집에서 제일 큰 식칼을 듭니다. 그리고는 나를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춥니다.


"성황신님, 당산신님, 우리 청주한씨 31대손, 이 막내 손자한테 든 객구를 물리치옵소사."


할머니는 주문을 외우면서 칼로 저를 겨누어 찌르는 시늉을 합니다. 나는 무서워 눈을 감습니다. 할머니는 짚단 불을 다시 내 몸 주위를 훑듯이 휘두릅니다. 나는 불에 탈까 겁이 나서 몸을 움츠립니다. 할머니는 주문을 계속 하다 입에 물을 머금고는 갑자기 제 얼굴에다 "푸 푸" 뿜어대면서 팥을 사방에 뿌려댑니다.


나는 이제 무서워 미칠 지경입니다. 할머니가 아니고 무당처럼 느껴집니다. 그 순간 할머니는 "객구야! 물러나라! 으시사"하고 외치며 칼을 대문 쪽을 향해 냅다 던집니다. 칼은 그대로 바닥에 꽂힙니다. 나는 후들후들 떨면서 비로소 객구에서 풀려납니다.

객구야, 물러나라. 으시사!

"야, 야, 언자 괜찮나?"

"할매, 언자 하나도 안 아푸다."


나는 다시 객구를 물릴까 두려워 얼른 대답합니다.


다시 동지가 되었습니다. 마누라는 할인 매장에서 동지팥죽 재료를 사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동지도 마누라나 아이들에게는 기도가 없는 팥죽 먹는 축제일 뿐입니다.

(2004. 12. 19.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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