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칠만큼 사랑하신다구요? 아서라, 마세요!
아침에 출근하면서 라디오를 켰습니다. 라디오에서는 아침드라마를 방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와 딸인듯한 여자들의 날카로운 쇳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웁니다.
"반지는 어쨌어? 그 놈하고 무슨 일이 있었니?"
"돈으로 결혼하는 것 같아, 돌려 주었어요. 미친듯이 사랑해야 결혼하죠?"
"야, 이년아! 미친듯이 사랑하는 건 미친 년놈들이나 하는 짓이야! 아이고, 그 놈에게 줄 것 다 주고 채인 것 아냐?"
그러고도 어머니의 독설이 한참이나 이어집니다. 매일 듣는 내용이 아니라서 줄거리가 어떻게 진행되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미친사랑!"
나는 문득 30년 전의 '미친 사랑의 전설'이 떠 오릅니다.
돌이는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 동안 한 번도 그의 고향을 벗어나서 생활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또래친구나 여자친구도 없는 외톨이였습니다. 졸업 후 돌이는 드디어 지긋지긋한 시골에서 벗어나, 그리던 대도시의 유명한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로 취직을 했습니다.
그러나 도회지에서도 혼자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회사와 숙소만을 오가는 생활이 5년 동안 반복되었습니다. 워낙 알뜰해서 돈을 모아서 전셋방도 얻고, 돈도 조금 모았다고 합니다. 그런 돌이에게 동네에 사는 아주머니가 중매를 섰습니다. 돌이 고향의 근처 시골마을에서 자란 22살 신부는 '직장도 괜찮고 마음씨가 착한' 돌이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몇 달을 사귀다가 둘은 결혼을 했습니다.
돌이는 신부가 좋았습니다. 돌이가 살던 전셋방에서 살림을 시작했는데, 처음으로 만져보는 보드라운 살결에 돌이는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신부는 생글 생글 웃으며, 돌이를 위해 상을 차리고 시장에서 사온 과일을 깎아서 입에 넣어 주었지요. 돌이는 그런 색시가 귀엽고 이뻐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공장 일을 하다가도 문득 색시가 그리워졌습니다. 돌이는 퇴근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마자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던 잔업도 땡이고, 종치기를 기다리는 그야말로 그는 '땡 맨'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색시에 대한 돌이의 사랑은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이제 가끔 색시와 더 있고 싶어 지각을 하거나 조퇴를 하기도 했지요. 직장 관리직 직원들과 동료들의 질책이 심해지는데도, 돌이는 색시에 더욱 집착했습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사랑하고 있어도 더 사랑하고픈' 돌이의 사랑은 이제 병이 되었습니다. 신부가 어르고 달래는데도, 돌이는 가끔 결근마저 했습니다. 회사에서는 '그런 식으로 일하려면 그만 두라'며 돌이를 윽박질렀죠. 그 동안 참았준 것도 결혼하기 전까지의 성실함 때문인데, 이제는 시간만 때우는 그를 동료들도 외면했습니다.
돌이는 일을 하다가도, 종종 무단 조퇴를 하고 신부가 있는 그들의 보금자리로 달려 갔습니다.
"순아! 나는 너 없으면 하루도, 아니 10분도 살 수 없어.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지? 사랑해!"
신부는 한낮에 가슴을 파고드는 돌이를 애잔하게 바라보다가, 흐느끼며 말했습니다. "이제 생활비도 없고, 빚만 늘고 있어요. 처음엔 당신의 발소리에 가슴이 설레었지만, 이젠 무서워요. 이렇게 계속하면 우리가 함께 살 수 없어요."
그날 이후에도 그런 날들이 이어지자 순이는 모진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던 어느날, 돌이가 점심 때쯤 조퇴를 하고 집에 왔는데.. 순이가 그녀의 짐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돌이는 회사에 나가지 않고, 시내를 구석 구석 헤집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색시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두달을 헤매다가 돌이는 처갓집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장인에게서 '어디 있는지 나도 모르네. 마음을 고쳐 먹은 것 같네'라는 대답만 돌아왔습니다.
돌이는 이제 살 이유가 사라져서 죽음을 결심합니다. 그러나 천성이 모질지 못한 그는 생명마저 자기 생각대로 끊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회사에서 해고가 되었다고 고향집으로 연락이 왔습니다. 돌이는 순이를 찾아서 전국을 헤매었습니다. 일년이 지나자 그 동안 모았던 돈과 방을 뺀 전세보증금도 바닥이 났습니다.
마지막으로 돌이는 처가를 다시 찾았습니다. "장인어르신, 한 번만 살려주이소. 순이만 돌아온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더. 회사도 착실히 다니고, 순이도 괴롭히지 않겠습니더. 정말임니더!"
장인은 사위를 찬찬히 훑어보았으나, 사랑병만 더 깊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 아이는 너무 집착을 하는 자네가 싫어졌다고 했네. 딴 마음을 먹고 벌써 팔자를 고쳤으니, 이제 자네도 그 애를 놓아주게. 자네는 그 애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괴롭히는 것이네!"
장인의 단호한 말에 돌이는 모든 희망을 놓았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가장골 너럭바위에 제 머리를 찣이겨 피가 범벅이 되어 쓰러져 있었습니다. 소 먹이는 아이들이 발견하지 않았다면 큰일이 날 수도 있었지요. 그날 이후 돌이는 방안에 틀어박혀서 한달여를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밥은 거의 먹지 않고, 물만 겨우 마신다고 했습니다.
그때 막 방학을 한 우리 또래친구들은 자야네 사랑방에 모였습니다. 매서운 겨울 칼바람은 문풍지를 달달 떨게 하더니, 여린 우리들의 피부에 오소소 소름을 돋게 만들고는 달아났습니다. 또래의 머슴애와 가시나들은 심패(손목) 5대 때리기 육백(화투)을 치고 있었습니다. 우리팀이 이겼습니다. 나는 숙이 손목의 옷을 걷어 올리고는, 두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댑니다. 키득거리며 제일 첫 심패는 손을 높이 쳐들고 힘껏 힘을 가했습니다. 숙이는 고개를 돌리면서 눈을 꼭 감습니다. 그리고 빨갛게 부풀어 오른 손목을 보며, 샐쭉해져서 나를 빤히 쳐다봅니다. 나는 두번째 이후는 짐짓 힘을 가하는 척 동작을 크게해서는 살포시 갖다 댑니다. 호롱불을 받아 발그레 홍조를 띠며 웃는 숙이의 얼굴은 얼마나 예뻤던지요. 어두워서 더 반짝이는 별빛보다도 훨씬 아름다웠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겨울밤 공기를 가르는 외마디의 긴 울음이, 고향의 밤공기를 '쨍그랑' 깨뜨렸습니다. "으~ 아~아!"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았습니다. "숙아! 돌이 아재가 와, 저라노. 니는 아나?" "아재가 색시한테 상사병이 걸렸다 카더라. 아이고 이 일을 우짜모 좋노?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저런 모질고 독한, 미친 사랑은 절대로 절대로 안할 끼다."
숙이는 도리질을 칩니다. 그리고 그날, 모든 것은 끝이 났습니다. 그는 정말로 정신이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산으로, 들로 미쳐서 돌아 다녔습니다. 고구마 밭이나 감자밭을 헤집어서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동네사람들은 혀를 끌끌차며 측은한 눈길만 보내었습니다. 그런 그의 광기도 세월을 따라 차차 잠잠해졌습니다.
엊그제 고향 길에서 나는 그를 만났습니다. 내가 인사를 하는데도,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그는 말을 잃었고, 생각마저 없어 보입니다. 그의 등에는 언제나처럼 지게가 달라붙어 있습니다. 봄과 여름에 그는 들에서 소꼴을 벱니다. 가을과 겨울에는 산에서 나무를 가득해서 짊어지고 내려옵니다. 그의 낫질은 그야말로 귀신처럼 재빠르고, 그의 나뭇짐은 단단합니다. 생각을 거세당한 돌이 아재는 참으로 사랑마저 다 잊은 것일까요!
돌이 아재의 색시는 몇 년 동안 '눈물로 지새며, 혼자 살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색시 마음에는 '개가를 했다'고 하면 포기하고 마음을 잡을 줄 알았겠지요. 지금은 어느 누구도 그녀의 소식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고 있지도 않습니다. 나는 가끔 그녀가 이미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문득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스물 두살 새색시 모습은 아직도 돌이아재의 머리 속에는 새겨져 있을 겁니다. 풀 이파리, 나무 그루터기 사이 사이에 그녀의 모습이 핏빛으로 맺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들은 이 세상이 다하면 다시 맑은 정신으로 만날 겁니다. 그래서 참 사랑을 할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세상만사,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고 했던가요?
그래요. 미친듯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집착일 뿐입니다. 그러니 첫 눈에 뿅가는 운명적인 사랑에 너무 목을 매지는 마십시오!'
(2006. 1. 19. 들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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