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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니 Oct 15. 2022

‘나’를 찾는 시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늦은 밤 집에 돌아와 침대 위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문을 닫은 뒤에도 종종 영업 중이냐는 손님들의 문의가 있었던 터라 낯선 번호가 찍힌 폰 화면을 보며 잠깐 멈칫했다. 매년 OECD 국가 중 노동시간 1, 2위를 다투는 한국에서 모든 노동자에게 일과 쉼의 양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휴일 없이 매일 디저트를 만들고 책을 읽고 모임을 하는 나는 휴식할 때만큼은 어떠한 방해도 받고 싶지 않다. 울려대는 폰을 몇 초간 응시하다 결국 전화를 받았다.     


“글쓰기 모임 신청하려고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안타깝게도 글쓰기 모임 2기 모집은 이미 며칠 전에 마친 상태였다. 지극히 사적인 내용으로 글을 쓰는지라 모임원 간의 신뢰와 글 유출 문제로, 추가 인원을 받지 않는 것이 모임원들과 함께 정한 규칙이었다. 나는 그런 상황을 설명하며 모집이 마감되었다고 말했다.

금방 끊을 줄 알았던 통화는 계속됐다.

왜 ‘여성’ 글쓰기 모임을 만들게 되었냐는 그의 물음에 사회적으로 여성은 남성보다 발언할 기회를 자주 잃으며, 특히 지역에 사는 여성일수록, 기혼일수록 그 정도가 빈번해서 그들이 억눌린 감정과 생각을 뱉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모임을 만들었다고 대답했다. B급 취향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은 그에게 내친김에 B급 취향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내 말을 잠자코 듣던 그는 자신이 곧 정년을 앞두고 있으며, 인생의 2막을 글쓰기로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글쓰기 모임을 꼭 하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요? 저도 용기를 내서 전화한 건데, 다음 기수를 모집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지금의 열정이 식을지도 모르잖아요.”

읽던 책을 덮고 그와 글쓰기 모임 3기를 모집하는 내용으로 몇 분간 통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글쓰기 모임 3기 모집 글을 SNS에 올렸다.     


사람들은 새로운 글쓰기 모임이 열리기를 기다린 것같이 참여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자신의 글을 써본 적이 없는 사람들로 구성된 3기 모임은 나와 통화했던 N을 비롯한 중년 여성 3명과 나, 그리고 청년 1명이 한자리에 모이면서 시작됐다.

첫 모임에서 15분의 시간 동안 ‘나이’라는 주제로 글을 썼다. 갑작스러운 글쓰기에도 정갈한 글을 완성한 모임원들의 글솜씨에 놀란 것은 둘째 치고, 자신을 숨기지 않는 진솔함에 놀랐다. 글쓰기의 가장 좋은 재료는 필력보다도 진솔함이라고 생각해온 나는 모임원들의 글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글을 소리 내어 읽는 과정에서 몇몇 모임원들은 눈물을 쏟아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민망해하는 모임원들에게 나는 자신의 서사를 쓰는 것은 치유의 과정이기도 해서 우는 게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더 울어도 된다고, 더 쏟아내도 된다고 휴지를 건네주었다.

첫 모임을 했을 뿐인데, N은 자신이 올해 한 일 중 글쓰기 모임에 참여한 것이 가장 잘한 일이라고 말했다. 본격적인 모임을 시작도 하기 전에 그런 말을 들으니 나는 묘한 기쁨과 부담감을 동시에 느끼며 어색하게 웃었다.     


두 번째 모임은 ‘놓친 것’이라는 주제로 글을 썼다. N은 사정이 생겨 모임에 불참하게 되었다면서도 완성한 글을 단체 채팅방에 올렸다. N의 글은 9페이지나 되었는데, 굵직한 사건들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미래까지 내다본 자신의 인생 서사였다.      


가난과 외로운 유년 시절을 지나온 N은 자신에게 고백한 사람과 한 결혼을 “사자 굴로 걸어 들어간 것”이라 했다. 그는 새벽 5시에 일어나 남편의 도시락을 싸고 아침을 차린 뒤 출근했다가 집에 돌아와 다시 가사노동을 하는 삶을 수십 년간 하면서 “결혼을 왜 했을까?” 자문했다.     


“나 하나만 참으면 집안이 평화롭게 돌아가니까 어쩌면, (인내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 되어버렸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언제나 남편의 요구에 맞춰 희생과 헌신을 감내해야만 했던 N의 이야기를 숨죽이고 읽어 내렸다.

누군가의 자식으로, 누군가의 배우자로, 누군가의 어머니로 살아온 N 글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글쓰기 모임원의 글을 읽고  적은 처음이었다.      


“왜 나를 사랑한다고 결혼하자고 해놓고, 평생 니 치다꺼리하는 하녀로 만들어 놓고, 내 젊은 세월은 어디 가고, 내가 가장 힘들고 아플 때,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고. 혼자라는 게 외로워서 결혼했는데, 너랑 결혼해서 더 외로웠다고.”     


N의 글을 끝까지 읽고 나서 그가 왜 그토록 글쓰기 욕망을 내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결혼한 여성에게 집은 끝없는 노동의 공간으로 변하고, ‘아내’, ‘엄마’로서의 정체성은 여성을 집어삼킨다. N 역시 여느 기혼 여성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지워야만 했던 세월을 살았다. 자녀를 다 키우고, 정년을 앞둔 지금에서야 ‘나’를 찾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그의 글에서 이른 아침에도, 늦은 밤에도 언제나 깨어있던 엄마를 발견했다.

언젠가 엄마께 ‘ 책을 읽지 않느냐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피곤하다고, 눈이 침침하다고 말했다. 나는 엄마가 직장 일 가사노동을 병행하는  알면서도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가 청소할 때 나는 책을 읽고, 엄마가 설거지할 때 나는 글을 썼다. 엄마와 나의 시간은 항상 다르게 흘렀다. 나는 엄마의 시간을 좀먹는 못난 딸이면서도, 엄마에게 항상 책 좀 읽으라 힐난했다. 내가 집에서 책을 읽을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엄마의 노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온전히 ‘나’로 존재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 글쓰기 모임에서 필명으로 서로를 호칭한다. ‘나’를 돌아보고, 돌보는 글을 쓸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정작 엄마에게는 그런 시간도, 그렇게 생각할 여지도 주지 않았다.     


엄마가 책을 읽고 글을 썼으면 하는 바람으로 나는 자주 독서 모임과 글쓰기 모임 이야기를 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반짝이는 눈으로 내 말을 경청했다.

중년의 여성들이 참여한 글쓰기 모임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안 엄마는 얼마 전 글쓰기 모임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글쓰기, 나도 하고 싶다. 그런데 엄마는 글을 잘 못 쓰잖아. 괜찮을까?”

갑작스러운 엄마의 말에 조금 놀랐지만, 기뻤다. 몇 번 망설이다 내게 전화했을 N처럼 엄마도 자신을 찾으려고 용기를 낸 것 같아서.     


글쓰기는 자신을 표현할 언어를 찾는 일이다. 가부장제가 견고한 사회에서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배우며 성장한 여성들은 언제나 침묵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그 침묵을 깨고, 글을 쓰며 자신을 드러내는 여성들이 있다. B급 취향에서 글쓰기 모임을 하는 금요일 밤은 나이와 직업, 이름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나’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서로 다른 시대와 삶을 살았지만, 글쓰기 모임에서  여성들의 경험은 같았다. 그들이 자신의 글을 읽다 흘리는 눈물에는 그간의 고통과 서러움이 묻어있다. 눈물에 전염되어 모두가 눈물을 흘릴 때는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겹겹이 쌓인 서글픔의 세월을 잠깐이나마 씻어낼  있기를 바라면서.

우는 얼굴을 하고서 다급히 휴지를 쥐여주는 사람들을  때면 나는 여성 글쓰기의 힘을 실감한다. 다른 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연대, 서로의 이야기에 보내는 공감, ‘ 찾아가는 과정으로써의 글쓰기.  시간을 많은 여성과 함께하고 싶다.  많은 여성이 잃어버린 자신의 언어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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