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평이 넘는 상가를 계약할 때, 이곳이 가까운 미래 포항의 새로운 문화적 공간이 되리라 상상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꿈이었다.
책방의 대표적 행사는 북토크다. 그래서인지 손님들은 “공간이 넓은데 북토크는 안 하느냐.”라고 종종 물어왔다. 그때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B급 취향을 운영하는 1년 동안 언제나 북토크를 생각했지만 한 번도 북토크를 한 적이 없다. 명색이 책방인데 한 번도 북토크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 내심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북토크를 할 수가 없었다.
책방은 수익이 나는 구조가 아니라서 공간을 유지하기에도 빠듯한 상황에 어떻게 북토크 비용을 마련하는지가 관건이었다. 이대로 공간을 허비할 수 없다는 생각에 북토크를 하기로 결심했지만, 얼마 못 가 북토크에 대한 기대는 좌절됐다.
자주 북토크를 하는 책방은 대부분 어떤 프로그램이나 단체의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 물론 나도 지원 신청을 하면 되는 일이긴 했지만, 모든 지원처는 내가 B급 취향을 열기도 전에 마감된 상태였다. 신청하려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했고, 신청하더라도 소수의 책방만이 합격하는 영예를 누릴 수 있었다. 게다가 책방지기 사이에서 몇몇 지원처는 모욕을 주거나 갑질을 일삼는다는 이야기가 떠돌아서, 막상 합격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 횡포를 견뎌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외부의 금전적 지원 없이 북토크를 하는 책방은 친분이 있는 작가에게 부탁하거나 출판사와 직접 소통해 작가를 초청했다. 당장 지원 신청을 할 수도 없고 아는 작가나 출판사도 없는 나는 북토크를 포기해야만 했다.
B급 취향을 열 때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자금을 투여했다. 무늬만 사장인 채 사계절을 보내는 동안 초조함과 불안함은 거머리처럼 내 마음에 달라붙었고, 통장 잔고는 커지는 거머리와 반비례해 점차 바닥을 보였다. 아무런 도움 없이 오로지 내 힘만으로 북토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판단했지만, 통장 잔고마저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이대로 북토크는 영영 못 하고 폐업 수순을 밟겠다고 생각하다 불현듯 잊고 지내던 적금 통장이 떠올랐다. 만기 된 적금 통장을 찾아 확인하니 적은 액수였지만 실낱같은 희망이 보였다.
나는 곧장 계산기를 옆에 끼고 북토크 계획서를 작성했다. 급격한 인기몰이로 한순간 스타 작가의 위치에 올랐지만, 신인 작가 시절부터 좋아했던 작가 A의 북토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A의 얼굴을 떠올리며 A의 페이와 예상 참석 인원, 그리고 북토크 내용을 임의로 설정했다. 계획서만 썼을 뿐인데 벌써 A가 내 옆에 와 있는 듯했다. 싱글벙글 웃으며 A의 대리인에게 북토크 제안서와 기획서를 보냈다. 곧 B급 취향에서도 북토크가 열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도취되어 며칠 동안 잠을 설쳤다.
목 빠지게 기다리던 A의 대리인에게서 온 답장을 열었을 때, 기다림의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대리인은 A의 페이를 조금 더 올려 조정해달라고 했다. A의 페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스타 작가라는 타이틀에 맞춰 내 딴에는 이미 상당히 높은 금액을 제시한 상황이었다. 사실 적금 통장에 들어있는 돈 전부를 페이로 지불하겠다고 작심하고 제안서를 보낸 것이었는데, 그보다 더 많은 금액을 요구하니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순간 머리가 백지장이 됐다.
다시 계산기를 꺼냈다. 이미 많은 것을 포기한 내 삶에서 어떤 것을 포기하면 추가 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렸다. 몇 달만 조금 고생하자는 마음으로 처음보다 조금 더 올린 금액을 썼다. 대리인은 A에게 전달한 뒤 답변을 보내주겠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그리고 나는 일주일이 약간 지난 어느 날 거절의 메일을 받았다.
A의 일정이 너무 빠듯해 북토크 참석이 어렵다는 대리인의 답장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처음 보낸 제안서에 기재되어 있던 북토크 날짜를 언급하며 거절하는 것이 핑계라고 느껴졌다. 차라리 페이가 낮아 참석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면 낫지 않았을까.
나는 사회에 드러나지 않은 이면의 존재들을 글로 보여주는 A가 B급 취향과 같은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다. 대리인의 답장으로 둔갑한 A의 거절 메시지를 보며, 그건 순전히 내 착각이었음을 확인했다.
속상한 마음을 달래며 다른 일을 찾아 몰두했다. 돈이 굳었다는 생각에 평소 자금이 부족해 입고하지 못한 책들을 주문했다. 기존에 거래하던 도서 도매업체에 내가 입고하고 싶은 책이 없는 경우가 많아 다른 도매업체와 계약하고 싶었다. 그리고 새로 계약할 회사의 직원이 B급 취향을 찾아왔다.
그는 반품과 관련한 조항을 짤막이 언급한 뒤 계약서의 내용을 일일이 설명했다. 계약서에 관련된 대화가 어느 정도 끝이 났을 때 그는 질문이 있느냐고 물으면서 계약서를 내밀었다.
나는 책을 함부로 다루는 손님들이 있어서 손상되는 것이 속상하다고, 혹시 그런 책도 반품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손님 때문에 손상된 책은 반품이 안 된다고 즉답하는 그에게 나는 “도매업체에서는 손상된 책 전부를 출판사에 반품하지 않나요?”라고 말했다. 그는 망설이다가 머쓱 해하며 “그건 그렇죠.”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대화 내내 ‘동네 책방이 활성화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던 그에게 대체 어떤 방법이 동네 책방을 흥하게 만들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 도매업체에서 제시하는 도서 공급률이 다른 곳보다 저렴하다는 강렬한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마진이 남지 않는 책을 어떻게서든 낮은 금액으로 입고해야 그가 말하는 “동네 책방 활성화”에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스타 작가가 되기 전 작은 동네 책방을 다니며 북토크를 하던 A의 사진을 봤다. 저 때는 페이가 얼마였을까, 얼마를 줘야 A가 저렇게 열의 있는 모습으로 북토크를 할 수 있었을까. 약간 긴장한 듯하면서도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 속 A를 보며 대답을 듣지 못할 질문을 쏟아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걸까, 아니면 돈을 좇는 자신을 감추고 글을 썼던 걸까. 답이 무엇이든 결론은 이거다. 자본은 이미 출판계를 잠식했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작은 책방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
주류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저서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경제의 가격 메커니즘을 결정한다.”라고 말했다.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주요한 개념으로 보는 자본주의 생태계 안에서 보이지 않는 손은 책방의 가격을 계속 낮춘다. 그리고 그 손에 의해 많은 책방은 사라진다.
A가 본, 도서 도매업체에서 본 B급 취향의 가격은 얼마일까? 그리고 지금 B급 취향은 얼마일까?
나는 이제 A의 책을 읽지 않는다. 그의 글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고 용기를 얻었던 지난 시간은 모두 먼지가 되었다. 그리고 손님이 막무가내로 꽂아 넣다 구겨진 흔적을 지우려고 애꿎은 책 모서리를 꾹꾹 누른다. 반품할 수 없어 내가 읽어야 할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