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새로운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아무도 신청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 속에 매번 독서 모임 공지를 올린다. 최소 인원은 세 명이지만 한 명만 신청해도 어떻게든 독서 모임을 진행하겠다는 마음으로. 다행히 지금껏 신청자가 없거나 최소 인원에 미치지 못한 적이 없어서 불안은 항상 기우로 그치곤 했다.
이번 독서 모임은 이전의 모임들과는 조금 달랐다. 아무리 처음 만나는 자리라 할지라도 다른 모임에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어색한 분위기가 해소되었는데, 이번 모임은 전체적으로 다소 차분한 분위기가 지속됐다.
어차피 내가 모임을 진행하고 주도하다 보니 가장 말을 많이 하게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날은 유독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발언 기회를 독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불편한 마음에 한동안 말이 없던 모임원 K를 향해 말씀하실 것 없느냐고 물었다. K는 잠시 생각하다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할게요.”라고 답했다. K의 무표정한 얼굴과 건조한 답변에 나는 조금 무안해졌다. 그저 발언의 기회를 공평하게 나누고 싶었던 것일 뿐인데, 왜 나를 민망하게 만드는지 순간 마음이 상하기도 했다.
참석한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을 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이런저런 화두를 던지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첫 모임에 대한 소감을 나눌 때 나는 아까보다도 더 무안하고 부끄러워졌다. K가 “오늘 나눈 이런 대화를,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정말 고마운 자리예요. 히니님이 B급 취향을 오래 지켜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K는 포항으로 이주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K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던 건 가부장적이고 폐쇄적인 포항 특유의 분위기에서 거북한 이야기만 줄곧 들어온 탓에, 그동안 자신이 원했던 대화를 주고받는 우리의 이야기에 집중했다는 걸.
모임을 마친 뒤 나는 부끄러움과 약간의 충격으로 독서 모임을 시작했던 이유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덜컥 B급 취향을 열었던 것까지도. 생각은 꼬리를 물고 계속됐다. 그러다 노동조합, 진보 교육감 선거캠프, 진보정당에서 일하면서 느낀 괴리감에 그간의 활동과는 다른 방식의 활동을 하겠다고 시작한 이 일이, 자기만족을 위한 오만함으로 변질된 건 아닌지 자문했다. 또 B급 취향을 오가는 사람들의 촘촘한 연대로 혐오에 얼룩진 서로의 마음을 보듬고, 누구나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되고자 했던 초기 목표를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를 생각했다. 독서 모임을 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선민의식에 차서 누군가를 교정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지는 않았나 하고.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독서 모임은 때마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참석하는 것이기에 참석자가 “돈값”을 했다고 느끼게 만들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내가 가진 역량과 지식을 모임에 모두 투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교정”이 필수요건이 아닌데, 나는 어리석게도 가장 편리한 그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몰랐던 내용을 알려주면 모임원 스스로가 독서 모임이 “돈값”을 했다고 느낄 것이라 지레짐작한 것이다.
수평적 의사소통을 위해 서로의 닉네임이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모임에서, 그 규칙을 만든 장본인인 내가 정작 그들을 시혜적으로 대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날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아마 한동안은 자려다가도 몇 번씩 이불을 걷어차겠지만, K의 발언 덕분에 더 늦지 않게 자기반성을 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과 독서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모임 자체가 “돈값” 이상의 가치가 있을지 모른다는 걸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 무척 다행이다.
책은 내가 알던 세상을 무너뜨리고 재건했다.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었을 때도 책만 있다면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내가 그린 미래가 희망으로만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독서와 별개로 부단한 자기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그동안 간과했다. 책에서 다양한 세상을 만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B급 취향을 운영하며 깨닫는다.
여러 조직에서 보고 느꼈던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반면교사 삼아 나의 방식으로 활동하겠다고 한 다짐처럼, 이번 일로 나는 남을 통해 나를 직시하고 다음을 생각했다. B급 취향을 연 뒤로 새로 배우는 것이 많아져 뭔가 어른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는데, 이렇게 또 하루를 배움으로 채웠다.
사람이란 원래 불완전한 존재라서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언제까지고 ‘어른이’로 살 것 같지만, 그래도 매일을 배움으로 채우다 보면 조금씩 달라지는 나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반드시 그러고 싶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