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5. 5억년 버튼

확실하게 누르지 못하게 할 방법이 필요하다

by 혼백
5억년 버튼.png

철학적 논쟁에 관심이 있지 않아도 유튜브 같은 플랫폼에서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다뤄 대다수의 사람이 아는 5억년 버튼 논쟁

간략하게 규칙을 설명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5억년 버튼을 누르면 이 세상과 아예 단절된 공간으로 이동하게 된다.

2. 그 공간 속에서 아무것도 없이 홀로 지내야 하며 5억년이 지나면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3. 그 공간은 현실과 시간을 공유하지 않는다. 버튼을 누르고 5억년이 지나 돌아오더라도 찰나라고 느낀다.

4. 현실로 돌아오게 될 때, 5억년 동안의 기억은 지워진다. 즉 버튼을 눌러도 아무 일도 없었다고 느낀다.

5. 그 이후 버튼을 누른 대가로 100만 엔 (현재 환율로 904만 1200원)을 받게 된다.


이 버튼이 눈앞에 있다면 눌러야 할까 말아야 할까...

지금까지도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00원만 줘도 누를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1조 원을 줘도 안 누른다는 사람도 있죠.


저는 100원만 줘도 누르는 쪽입니다. 100만 엔을 준다면 당연히 눌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거기서 5억년을 보낼 저는 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버튼을 누른 나, 버튼을 누르고 찰나의 순간에 다른 공간에 가서 5억년을 보낼 나.

거의 동시에 존재한다고 봐도 되겠죠. 공간적 위치만 다를 뿐이고.


저랑 똑같은 외모에, 똑같은 성격, 똑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버튼을 누른 그 이후의 기억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남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겠죠. 심지어 그 5억년이라는 까마득한 시간 속에서 표류할 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소멸합니다. 기억이 지워지기 때문이죠. 거기서 5억년이 아니라 5조년을 보낸다고 해도 버튼을 누른 저는 아무런 손해를 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거기서 고생한 기억은 지워지니까.

제 앞에 그 버튼이 있다면, 생각도 안하고 타타타타타타탁 누를 겁니다.


저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이 적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친구 여러 명과 이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해봐도 거의 반반으로 나뉘곤 했습니다.

친구에게 "그럼 내가 5억년 버튼을 누르고, 돈을 받으면 너에게 반을 나눠준다고 했을 때. 누르게 할 거야? 아니면 뜯어말릴 거야?"라고 질문했을 때, 대답을 시원시원하게 하지 못하던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네요.


몇 년이 지나 최근엔 이 주제를 가지고 고민을 한적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버튼을 쉽게 누르지 못하게 할까?'

... 참 쓸데없는 주제에 생각을 낭비하는 편입니다. 그 쓸데없는 주제의 결론을 여기에 써보겠습니다.

아래는 제가 새로 만들어본 5억년 버튼의 규칙입니다.


1. 5억년 버튼을 누르면 이 세상과 아예 단절된 공간으로 이동하게 된다.

2. 그 공간 속에서 아무것도 없이 홀로 지내야 하며 5억년이 지나면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3. 그 공간에 갇혀 '5억년을 지낼 나'에겐 일주일 후, 새로운 버튼이 주어진다.

4. 그 버튼을 누르면 '버튼을 누른 나'는 이곳으로 오고, '5억년을 지낼 나'는 현실로 나간다.

즉 서로의 위치를 바꿔주는 버튼이다.

5. 변환 버튼은 하루 동안만 유지되고, 그 이후엔 영영 누를 기회가 사라진다.

버튼을 누르는 것의 여부는 '5억년을 지낼 나'가 선택한다.

6. 변환 버튼을 누르고 현실로 나가면, 일주일 간의 기억과 경험이 유지된다.

7. 그 이후엔 똑같이 100만 엔이 지급된다.



이런 조건이라면, 눌러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만약 5억년 버튼을 누르고, 그 공간 속에서 제가 또 변환 버튼을 누른다면, 일주일간의 끔찍한 경험을 갖고 현실로 나오게 되는 거죠. 만약 변환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면 일반적인 5억년 버튼과 똑같습니다.

저는 이런 변형된 5억년 버튼을 구상하며, 생각했습니다.


'5억년 버튼을 누를지 말지는 몰라도, 변환 버튼은 무조건 누를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였습니다. 하루동안의 고민 시간도 너무 깁니다. 다들 버튼을 보자마자 누르겠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5억년이라는 아득한 시간...

왜 나는 이걸 견뎌야 하지? 이 버튼을 누르면 지금 당장 나갈 수 있는데?

거기서 5억년 버튼 누르고 바로 돈을 받을 나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사실 분해해서 해석하면, 5억년 버튼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일주일 간의 경험이 100만 엔과 바꿀 수 있는가겠죠. 변환버튼은 무조건 누를 테니.

그리고 나의 위치가 바뀐다는 공포도 변수로 작용하겠죠.

따지고 보면 나와 똑같고, 일주일간의 경험만 추가될 뿐이지만, 그 경험은 지옥에 비견될만할 겁니다.


변환 버튼을 누르는 게 무조건 이득인 것 같지만, 거기서 변환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면, 일주일간의 기억도 없이 바로 돈을 받겠죠. 거기에 갔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할 겁니다.

변환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면 정말 아무런 손해 없이 돈을 받게 될 겁니다.

문제는 그 생각을 앞으로 5억년을 지낼 내가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겠죠.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은 새로 만든 이 5억년 버튼이 눈앞에 있다면 누를 건가요?

저는 한번 눌러보고, 그 이후로 문제가 없다면 계속 누를 것 같습니다.

만약 버튼을 눌러 탈출해서 일주일의 기억이 남는다면... 끔찍하겠군요.

일단 눌러본다는 건 결정했죠. 미련한 걸 지도 모르겠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4. 꿈의 색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