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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2.2.4. 죄의 심각성

인간의 존재적 부패

by 에스겔

어느 날 아침 나는 생각했다. 이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이들 존재의 죄성을 어찌해야 할까? 인류의 역사는 죄의 역사다.


01.3.2.2.4.1. 존재적 부패의 양상


인간들은 그것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들은 자기 자랑에 미쳐버린 무뇌의 괴물들이다. 자기 자랑을 위해서는 자신의 살인과 강간, 그리고 방화도 모두 정당화시킨다. 그것을 영웅들의 역사요, 위대한 제국의 역사로 포장한다. 싸이코패스가 동일한 짓을 하면 처벌을 받지만 이데올로기를 위하여, 또는 황제를 위하여 수많은 살인과 방화, 강간을 하면 칭송을 받고 공신의 반열에 오르거나 국가적 훈장을 받는다. 약탈자가 자기 얼굴에 피를 뒤집어쓴 채 막아서는 남편을 베어 죽이고 남은 여인을 강제로 강간하는 모습은 악귀나 다름없다. 그런데 전장에서는 그런 자들이 소위 용맹을 발하고 적을 더 잔악하게 살해한다. 그러니 그들은 전장의 영웅이나 용사로 칭송을 받는다. 현대 전에서도 이런 일들이 종종 벌어진다. 그래도 국제사회의 여론이 들끌어오르기 때문에 최대한 자제를 한다. 그런데 인터넷이 발달하지 못했던 불과 100년 이전의 전쟁들에서 이런 것들은 당연시되었다.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는 약탈을 허용해야 했다. 살인이라는 자체가 미친 짓이다. 그것도 수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무리들이 모여 집단 살인을 하는 전쟁은 도저히 인간이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기의 도가니다. 그것도 자신도 언제 적군에 의해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공포를 감당하며 그 짓을 하라는 것은 도저히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정상적이지 않은 쾌락을 보상으로 주고 죽이지 않으면 너를 죽이겠다는 협박이 필요하다. 협박으로 또는 세뇌로 살인을 정당화시키고 그 행위의 보상으로 극악의 쾌락을 선물하는 것이다. 상대들의 것을 마음껏 빼앗고 심지어 목숨도 빼앗고 죄도 없는 자를 그 아내를 겁간하기 위해 죽인다. 그 딸들을 욕보이기 위해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베어버린다. 그것이 전쟁의 실상이다. 그 이후에도 패전국에게 공물이라는 이름으로 극악한 도적질을 단행한다. 그리고 또 쾌락의 노리개로 삼기 위한 여인들을 공녀로 바치라고 요구한다. 여전히 강간을 원하는 것이다. 이제는 광기가 걷히고 전시도 아님에도 이런 저질스런 탐욕의 침을 여과 없이 상대를 향해 흘린다. 부끄러움도 없다. 어제는 상대가 이기고 오늘은 내가 이긴다. 그렇게 하면서 서로서로 이런 미친 탐욕의 침을 흘려 온 세상을 검은 주검의 악으로 물들인다. 서로 이런 짐승과 같은 상대의 민낯을 알기에 전시가 아니라도 언제나 전쟁 준비에 몰두한다. 그렇게 전쟁준비에 몰두하지 않으면 반드시 상대에게 패해 상대의 탐욕의 침이 얼굴에 흐르고 상대가 자신의 가슴의 섶을 열고 하체를 범하는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총력을 기울여 전쟁에 대비한다. 군대를 기르고 무기를 개발하고 정비하기를 게울 리 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국가다. 혼자 힘으로는 효과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타자인 짐승들을 상대할 수 없기에 여럿이 모여 힘을 합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싸움이 벌어지는데, 그 여럿이 또 여럿을 정복하고 결국은 점점 더 큰 집단을 형성해야 했다. 왜냐하면 인간의 탐욕은 그 끝이 없기에 본능적으로 더 큰 힘을 가지면 더 큰 착취를 하고 더 많은 적국의 여자들을 쾌락의 도구(공녀)로 거느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인간이 에덴을 떠난 이후 인간은 단 한 번도 편안한 공동체 생활을 한 적이 없다. 언제나 짐승들과 같이 투쟁 속에 존재하는 악귀로 살았다. 가인이 아벨을 쳐 죽였듯이 그리고 라멕이 소년들을 죽였듯이 또 수많은 살인과 강간과 약탈이 자행되었듯이 인간은 도적이었다. 목숨을 죽여 도적질 한다. 상대의 재산을 도적질 한다. 그리고 심지어 원하지 않는 여성의 쾌락과 그 몸을 도적질 한다. 누가 인간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다는 말인가? 단지 힘이 조금 세다는 이유 만으로 그것을 자행할 수 있다는 말인가?


01.3.2.2.4.2. 존재적 부패의 법칙


그것이 자연의 법칙인가? 적자생존이 어떻게 자연의 질서라는 말인가? 그 법을 나는 만든 적이 없다. 인간이 타락하여 모든 세상에 타락이 임했다. 처음 사자는 풀을 뜯고 평안히 살았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여 간악한 도적이 되니 사자는 다른 짐승들을 약탈했다. 그 피맛을 봐버린 사자의 본성은 다른 곳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 인간의 것이었다. 온 세상의 통치자가 그렇게 잔악한 도적이 되니 모두 그 도적의 질서가 내면에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내면의 광기가 온 자연을 뒤덮었다. 세상 자체가 지옥도가 된 것이다. 사자는 가장 강한 살인자요, 약탈자다. 그리고 그 보다 약한 것들도 제각기 약탈자들이 되어갔다. 그리고 먹이 사슬의 가장 약자들은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을 수 없으니 풀을 뜯고 그대로 살았다. 초식동물의 이는 다른 동물들을 물어 송곳니로 그 살점을 뜯을 수 없게 되어있다. 그래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산다. 그런데 이런 자연계의 약자들은 언제나 강자들의 약탈의 대상이 된다. 이 질서는 자연의 질서가 아니다. 단지 타락한 인간에 의해 약탈의 법이 자연의 법이 되어 벌어진 비극일 뿐이다. 이렇게 하여 자연은 자연이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지옥도가 되었다. 아무도 편안히 잠을 잘 수도 없어졌다. 언제 약탈자가 들이닥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낮에도 한시도 안심할 수 없다. 약탈자가 하늘에서 또는 수풀에서 숨어 언제 자신의 숨줄을 죄어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자연 안에 안식이란 없다. 이는 인간이 안식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언제든지 경계하고 경쟁하여 자신의 힘을 길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자신보다 강한 자가 나타나 자신을 약탈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유목과 자연채집 생활을 할 때는 이런 광적 약탈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그리고 국가나 공동체가 생기면서는 어느 정도 국가의 법이라는 통제가 생겨 이를 막아주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통치자들이 선전하는 달콤한 감언이설에 불과했다. 법이라는 것은 힘 있는 자들이 자신들만 합법적으로 약탈할 수 있도록 만든 공교한 속임수였다. 돈과 권력에 의해 또 다른 형태의 착취가 계속되었다. 약한 자는 강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했다. 돈을 잃고 빚을 지면 그 빚 대신 딸과 아내를 내놓아야 했다. 그러면 딸과 아내는 합법적인 강간을 당하는 창녀들이 되었다. 아들들은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전쟁에 나가 생명을 착취당했다. 단지 형태만 바뀌었을 뿐 사악한 도적질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과거 자연채집을 할 때에는 작은 단위에 순진했던 약탈의 형태가 더 집단화되고 더 교묘해졌을 뿐이다. 그때는 표면적으로 약탈의 형태가 드러났지만 이제는 표면적으로는 법이라는 올무가 씌워졌기에 함부로 힘으로 저항하거나 힘을 사용하여 상대에게 복수를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상대가 행한 약탈은 힘 있는 자들이 교묘하게 만든 덫인 법에 의해 옳다고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힘 있는 자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진 법은 힘이 없는 자신의 복수는 불법으로 간주하여 막아버린다. 아내가 수 없는 남자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창녀가 되었는데 이제 자신은 그 복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법이라는 것이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 법은 힘이 없는 자신에게는 불리하기만 하다. 그래서 그 법이라는 것을 어기고서라도 복수를 하면 그것은 불법이 된다. 결국 그 법이라는 것이 다시 자신을 억압하고 심지어 목숨도 빼앗는다. 물론 법의 선한 기능들이 많다. 또 법의 허점들도 보완이 되어나간다. 그러나 그 법을 만드는 자들이 돈과 권력을 쥔 자들이기 때문에 그 법은 언제나 약자들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또 힘 있는 자들은 언제나 그 힘을 사용해 법의 유리한 편에 설 수 있기 때문에 약자들은 더욱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다. 돈과 권력이 있는 자들이 결코 자신들에게 불리한 법을 제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법이 공평해지는 듯해도 법은 점점 약자들에게 불리하게 발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이 법이기에 약자들은 어찌할 수 없다. 돈과 권력이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수많은 방법들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법적으로 유리한 방법으로 약탈을 자행한다. 빚 때문에 여자를 강간하거나 팔아 창녀가 될 수 없도록 법으로 만들어도 소용이 없다. 빚을 감당할 수 없는 자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압박을 가하여 스스로 선택하여 몸을 팔도록 유도를 하게 하는 교묘한 술수를 펼치면 법도 막을 수 없다. 스스로 강간을 당하는 창녀의 길을 선택했으니 합법이라는 것이다. 돈과 권력은 얼마든지 다양한 수단을 제공하기에 이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너희 인간이 저지르는 악의 아주 작은 단면만을 묘사했을 뿐이다.


01.3.2.2.4.3. 화인 맞은 양심을 가진 존재


이 글을 읽는 너는 이것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너는 작게든 크게든 이 사회의 시스템에 속하여 이 일에 일조하고 있다. 약탈자들이 사용할 수단인 돈을 또는 권력을 약탈자들이 얻을 수 있도록 너는 하수인 역할을 한다. 그 이유는 약탈자들이 급여라는 형태로 돈을 지불하기 때문이다. 너는 쥐꼬리만 한 돈을 받고 이 시스템에 종속하는 하수인이다. 네가 사회의 어떤 곳에서든 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면 너는 이 모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착취의 모든 힘을 모으는 일에 일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가 탄 배는 해적선이기에 네가 열심히 일을 하면 할수록 너는 해적질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네가 더 빠르고 더 강한 배를 만드는 기술자라면 너는 해적질을 더 효과적을 더 많이 하도록 돕는 부역자가 된다. 네가 청소를 열심히 한다면 너는 해적들에게 위생을 제공하는 것이다. 혹시 모를 전염병을 막아주는 것이다. 너는 해적들의 건강을 지켜 해적들이 아파서 해적질을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한 장소에서 밖에 해적질할 체력이 없던 해적들에게 두 세 장소에서 약탈이 가능하도록 만들 것이다. 네가 만약 맛있고 건강에 좋은 음식을 만든다면 너는 해적들을 더욱 건강하게 하여 그들이 더 세어진 힘으로 더 악랄한 약탈을 자행케 할 것이다. 그 힘으로 더 많은 여자들을 강간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네가 합법이라고 느끼는 법은 사실 해적의 법이기에 그 법 안에서 네가 합법이라 하여도 너는 여전히 도적질과 강간과 살인을 돕는 부역자일 뿐이다. 네가 일한 그 일이 모여 결국 무기가 되어 무죄한 상대국을 약탈하는 도구로 사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은 이런 지옥도요. 그 본질은 해적이요, 도적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너희 인간들은 이런 것에는 관심도 없다. 왜냐하면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만 잘 먹고 나만 편하면 되는 것이다. 시스템에 의해 무엇이 벌어지건 관심이 없다. 지극히 이기적이다. 결코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런 말을 들어도 어떻게든 부정하고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대든다. 왜냐하면 지금 누리는 알량한 급여를 루트로 하는 쾌락들이 너무 좋기 때문이다.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누리는 작은 위세가 타인의 죽음과 제 몸을 겁간당하는 타인의 고통보다 더 중하기 때문이다. 무죄한 소시민이라 자부하는 너도 결국 자유로울 수 없는 해적의 일원일 뿐이다. 이렇게 자기 죄를 정당화하고 죄의식조차 느끼지 않는다. 심지어 아예 처음부터 생각조차 않는다. 싸이코패스가 살인을 하면서도 결코 죄라고 인식하지 않는 것처럼 아예 양심의 판단 기능을 시작도 않는 것처럼 너도 동일한 싸이코패스일 뿐이다. 그가 상대를 죽이면서도 양심의 가책도 없이 오히려 쾌락을 경험하는 것처럼 너도 그런 쾌락을 탐하는 돈과 권력의 하수인일 뿐이다.

우리는 그 수많은 세월 동안 인간들이 자기 최면을 걸어 자신을 속이며 행하는 수많은 사악한 악행들을 보았다. 누군가는 적자생존, 그것이 궁극의 법이라 하며 또는 질서라 했다. 그렇게 그들이 행한 수많은 수단들을 통해 나의 자식들이었던 것들이 쓰레기처럼 죽어 지옥에 버려지는 것을 보았다. 수많은 목숨들이 희생되고 수많은 영혼들이 지옥의 나락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래도 그 일을 자행한 자들은 모두 자신들을 정당화했다. 정의를 위한 혁명이라고 했지만 결국은 자신들의 탐욕이었다. 굳은 결의로 사회악을 척결한다고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해서 권력을 잡고 타인들을 지배하고 자신이 비판한 자들과 똑같은 착취를 계속했다. 그 자신이 하지 않으면 그 후대들이 그렇게 했다. 결국 그들의 정의는 결국 자기 탐욕을 정당화할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다. 그 깊은 내면은 바닥까지 타락하여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가련한 자들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준 양심이 작동하는 것을 보고 자신들은 선한 존재라고 착각한다. 그것도 양심을 따라 잘 살지도 않으면서 그 일부를 더러운 걸레와 같이 실행하였음에도 자신을 선하다고 생각한다. 양심이 있어 양심을 따르더라도 그 모든 것을 자신들의 자랑으로 삼고 자신의 업적으로 삼아 그것을 내세워 신에게 대들기도 하고 그 옳음으로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자신을 우위에 놓는다. 나는 이렇게 옳으니 너희는 나의 말을 들으라고 한다. 누가 너희에게 그럴 권리를 주었느냐? 너희가 가진 것 중 너희 스스로 창조한 것이 있느냐? 너희가 가진 모든 능력은 어디에서 나왔느냐? 스스로 의도하여 유전자를 만들고 그 유전자대로 태어나 자신의 모든 환경과 모든 물질을 스스로 창조하여 산 자가 있느냐? 그렇다면 그는 자랑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모두 내가 만든 피조물이며 그 피조 세계 안에 내가 심어 놓은 공교한 설계도를 따라 태어난 존재들이다. 나는 설계자며 유지자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다. 만물은 나의 능력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그 존재 자체가 유지될 수 없다. 그런데 너희를 우리가 뛰어난 존재로 만들었다 하여 너희가 스스로 자랑할 수 있느냐? 내가 너의 존재를 원치 않는 순간 너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런데 무엇으로 너의 자랑을 삼을 수 있느냐? 이렇게 말하는 우리에게 반항심이 든다면 너는 역시 반역자 도적놈의 심보를 가진 독사의 새끼다. 가장 거룩했다는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독사의 새끼들이란 말을 했을 때 그들은 반항심에 악심을 품고 거짓증인들을 내세워 나에게 누명을 씌워 사형시켰다. 그 일에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사울도 포함되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이름을 큰 자인 사울에서 작은 자인 바울로 개명하고 자신은 죄인의 괴수라 고백했다. 그는 자신의 실상을 동굴밖으로 나와 밝은 빛 안에서 보고 깨달은 것이다. 그들이 그랬을 진대 일반적인 인간인 너는 오죽하겠느냐? 당연히 깨닫기 원하지 않으며 그러니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저희가 듣고 돌이켜 깨닫고 회개할까 함이라"라고 말한 뜻이 무엇인지 깨닫기 바란다. 나의 심중의 말은 깨닫지 못하는 너희의 상태를 한탄한 것이다. 결코 너희가 깨닫지 못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도저히 그것이 안 되는 것을 아니 반어법으로 한탄을 쏟은 것이다. 너희는 나도 어찌할 수 없는 존재들이 되어버렸다.


01.3.2.2.4.4. 존재적 죄인


이런 인간을 개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을 교육하여 선한 존재로 만든다는 것은 개를 세뇌하여 자신을 코끼리라 믿게 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해프닝이다. 인간은 결코 그렇게 개선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을 아무리 교육한들 결코 선한 존재들로 만들 수 없다. 이미 죄의 탐욕에 물들어 헤어 나올 수 없는 괴물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지만 그 죄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그 존재가 문제다. 존재적으로 죄인기에 죄를 짓는 죄의 존재다. 그래서 단순히 가르침으로 행위들을 개선시키려 해도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말은 말의 유전자를 가졌기에 본능적으로 달리는 것을 원한다. 이와 같이 죄의 유전자를 가진 존재적 죄인은 아무리 개도 하려 해도 결국 죄를 향해 달리는 본성을 고칠 수 없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죄성을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기준을 모호하게 하고 그런 인간을 그냥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물론 그런 악한 인간의 본성 안에서 어떻게 하면 서로에게 상처를 덜 줄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현재적 상태를 관찰하고 그 시대의 현재적 평균상태에서 인간이 유지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결코 절대적 기준에서 인간을 치료하거나 회복시키지 못한다. 또한 심리학은 그 시대의 평균적 상태로 인간을 유지하는데도 한계를 드러냈다. 물론 심리학을 포함하는 정신의학도 동일하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요, 그 한계가 인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구약의 대부분의 시간들을 보냈다. 인간들은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절망적인지 인식하지를 못했다. 그런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의 탐욕을 정당화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내세우는 이념을 정당화했다. 그런 자들의 약속의 특징은 따르는 자들에게 그들의 탐욕을 만족시킬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합법적인 방법으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약속했다. 또한 자신의 모든 행위는 정의로 포장하고 자신이 하는 모든 불법적 행위는 변명을 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존재적 죄인이다. 죄를 범하여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죄인으로 태어나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적 죄인이다. 너희는 존재적 죄인이다. 너희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너희가 죽는 것이다. 그전에는 여전히 너희는 죄를 지을 것이다.


01.3.2.2.4.5. 죽음과 부활


우리는 노아의 후손 중 아브람을 불렀다. 후에는 그의 이름이 아브라함이 되었지만 내가 처음 불렀을 때 그는 아브람이었다. 그는 우상을 제작하는 아버지 데라를 따라 우상을 숭배하는 삶을 살았다. 그를 불러 내가 누구인지 알렸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에게 구원을 알려주는 일들을 했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나는 세상에 왔고 나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졌다. 이것은 구원의 계획 이후에 언급되어야 하나 구원의 성격을 설명하려면 필수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인간이 된 것은 이런 인간의 절망적 상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인간이 되어 죽었고 그리고 부활했다. 이제 나의 죽음과 부활이 왜 인간에게 구원이 되는지에 대해 설명하겠다.


01.3.2.2.4.5.1. 존재적 죽음과 부활


인간은 존재적 죄인이라 죄인인 자신이 죽지 않고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죽고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한번 죽으면 바로 심판이 있기에 죄인인 상태에서 죽어서는 해결할 수 없다. 죽음 이후에 다른 해결책이 주어지지 않고 바로 지옥의 형벌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인간으로 가서 너희를 대신해 죽었다. 내가 인간으로 간 것은 너희를 대신하기 위해 갔기 때문에 내가 죽는 것은 네가 죽는 것이 된다. 너는 직접 죽지 않았지만 나를 믿고 나의 아래에 들어와 참포도나무인 나에게 접붙여지면 나의 가지가 되어 나와 같이 죽은 것이 된다. 나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기 때문에 나의 공로를 인정받아 나와 하나로서 죽은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나와 함께 죽었기에 너희는 죄에 대해 존재적으로 죽게 된다. 이것은 법적인 죽음의 인정이다. 또한 법적으로 나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새로 태어난다. 바로 부활과 연합하는 것이다.


01.3.2.2.4.5.1.1. 죄에 대한 죽음과 의에 대해 삶


나와 연합하여 죄에 대해 죽으면 너는 죄의 유혹과 죄의 지배에 대해서도 죽게 된다. 죽음으로 더 이상 죄의 존재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죄의 유혹에 져서 죄의 종노릇 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죄를 이기는 것이다. 죄를 이기고 우리의 뜻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뜻을 이루는 것을 의라고 한다. 쉬운 말로 우리의 뜻을 이루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 옳다는 것을 한자로 의라 한다. 이렇게 우리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01.3.2.2.4.5.1.2. 세상에 대한 죽음과 하늘나라에 대해 삶


나와 함께 죽어 죄에 대해 죽으면 죄를 짓는 세상에 대해서도 죽는다. 더 이상 죄에게 굴복하고 죄에게 순종하는 세상에 소속되지 않게 된다. 죄를 이김으로 죄가 지배하는 세상에 소속되지도 않고 그것에 굴복되지도 않는다. 이제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나의 나라에서 살게 된다. 우리의 뜻을 따라 우리의 통치에 있으니 그는 이제 우리의 나라 즉 하늘나라에 있게 된다. 이를 원어에 가깝게 표현하면 우리의 통치 즉 하늘의 통치에 있게 된다. 죄에 대해 죽고 나와 함께 다시 살아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01.3.2.2.4.5.1.3. 사탄에 대한 죽음과 우리에 대한 삶


죄에 대해 죽음으로 이제 인간은 사탄의 유혹에 굴복하는 사탄의 종이 아니다. 이제 죄를 이김으로 사탄을 이기는 자가 된다. 그리고 이제 사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 자유자가 된다. 종이 아닌 자유자인 아들이 되어 살게 된다. 바로 우리의 아들이 되어 우리의 뜻을 따라 거룩하고 선한 존재가 된다. 이렇게 하여 우리에 대한 모든 기능을 잃고 죽었던 곳에서 우리에 대해 기능을 하는 산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스스로를 통제 못하는 종이 아닌 스스로를 통제하여 죄를 이기고 마음속으로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01.3.2.2.4.6. 새로운 존재(하나님의 아들)


이렇게 우리와 같이 선한 존재가 우리의 형상을 가진 우리의 아들이다. 바로 우리를 닮은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나의 부활과 연합하여 다시 태어나 우리의 형상을 가진 우리의 아들이 된다. 바로 신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이방 종교에서 그렇게 염원하던 반인반신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성경에 너희를 신이라 했지만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내 안에 있으면 첫 아담과 같이 그리고 두 번째 아담이었던 나와 같은 지위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너희 인간들의 탐심이 아닌 내가 사랑하여 나를 닮게 만든 존재들에게 준 놀라운 지위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다. 나 예수도 인간이 되었기에 너희들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처음 인류의 대표로 처음 난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첫 아담은 실패했지만 두 번째 아담인 나는 우리(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전한 순종을 하여 죽기까지 인간으로서 우리 신들에게 복종했다. 그러므로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롬 1:3) 그 인정됨은 인간으로서 된 것이다. 나는 원래 우리 안에서 신인데 어떻게 내가 누군가의 아들이 되는가? 나는 아비도 어미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다(히 7:2~3) 그런데 내가 누구를 아비라 부를 것인가?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 너희를 대신하여 살았기에 너희를 대신하여 우리(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것이다. 내가 그렇게 산 것은 신으로, 신의 능력으로 산 것이 아니다. 나의 전 존재는 인간으로 그 삶을 살아냈다. 인간인 나는 타락하기 전의 첫 아담과 같은 상태였다. 그래서 바울은 나를 두 번째 아담(사람)이라고 했다. 아담(사람)으로 복음서에 기록된 삶을 살 수 있었던 비밀이 나에게 있었다. 나는 완전한 인간으로 성령을 한량없이 부음 받았다. 첫 아담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성령이 함께 하여 나에게 능력과 지혜를 부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제한된 몸으로 살았지만 하늘에서 임하는 전능의 능력으로, 하늘의 존재로 살았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산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이를 헬라적 신학에서는 착각하였으나 원래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은 분명 인간임을 너희가 진진하게 성경을 관찰한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원래 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원래 신이었으며 인간으로 왔을 때도 나는 신이었다. 그런데 인간들을 위해 잠시 신의 지위를 내려놓고 온전한 인간으로 인간을 대신하여 살았다.] 이와 같이 나를 믿는 자들도 나와 같이 성령을 통해 타락하기 전의 거룩한 첫 아담과 같이 그리고 두 번째 아담인 나와 같이 거듭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성령이 한량없이 부어짐으로 나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 살게 된다.

이것은 행위를 고치는 것이 아니다. 죄 하나하나를 이기는 승리가 아니다. 이것은 존재 자체가 바뀌는 것으로 죄와 사탄과 세상을 이기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바로 존재적 승리요 이김이다. 그래서 이렇게 이기는 자들은 어둠에 속할 수도 없고 형제를 미워할 수도 없다. 그리고 악한 자가 만질 수도 없다. 세상의 미움을 이기고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 세상의 슬픔을 이기고 하늘의 행복자가 된다. 세상의 탐욕을 이기고 거룩한 자가 된다. 이렇게 세상과 사탄과 죄를 이기는 이김을 얻게 된다. 이제 그 모든 것을 이기는 능력을 가진 자가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스스로를 어쩌지도 못하는 노예가 아닌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선한 양심을 따라 사는 능력의 아들들 즉, 성령 안에 있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이 구원을 위해 나는 계획을 세웠다. 이미 아담과 하와에게 처음 약속했으며 또한 노아에게 그 구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그 구원을 이룰 계획을 나는 계속 실행했다. 그 계획의 실행의 첫출발은 아담의 톨레도트(연대기)였으며 이미 그전에 천지의 톨레도트(연대기)였다. 그리고 아브람을 부른 것이다. 그에게 구원의 계획을 알리고 하늘에서 세워진 계획에 따라 땅에서도 구원을 위한 준비를 하게 했다. 그 계획을 따라 나는 세상에 인간으로 갈 것이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 다음 글 구원의 계획에서 다루어 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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